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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남자는 말야
가을은 기분 좋은 떨림을 줍니다
by
박은석
Sep 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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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 9월의 어느 날이었다.
학생회 회장 부회장 선거가 있었다.
우리 반에서 회장도 나오고 부회장도 나와야 한다며 친구들이 나를 밀었다.
안 한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반의 자존심이 달려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해봐도 나는 회장감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부회장에 출마했고 다른 친구는 회장에 출마시켰다.
다른 반에 비해서 준비가 늦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친구들은 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서로 머리를 모아 전략들을 짰다.
이전에는 전 학년 조회 때 운동장에서 선거유세를 하는 게 선거운동의 전부였다.
그런데 그 방법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았는지 친구들은 아는 선후배와 동기들에게 개별적으로 접촉을 하였다.
방과 후에는 선거 포스터를 만들어서 눈에 띄는 곳에 도배를 했다.
심지어는 남녀화장실에까지 붙여 놓았다.
정말 열심히 준비를 했다.
준비를 잘했다고 해서 선거에 당선된다는 보장은 없다.
그때도 그랬다.
결국은 출마자가 잘 해야 한다.
이제 남은 일은 순순히 나의 몫이었다.
내가 연설을 잘해야 했다.
9월의 그날 아침 운동장에 줄 맞춰 서 있는 학생들을 바라보면서 단상에 올랐다.
준비한 연설 원고가 있었다.
‘제가 만약 부회장에 당선된다면 회장을 도와서.... 우리 학교를 이렇게 만들겠습니다.’라는 상투적인 문장도 들어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첫 문장이 중요했다.
유비, 관우, 장비와 합류하기로 하면서 제갈량이 외친 출사표(出師表)에는 못 미치더라도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문장이 필요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난감했다.
어쨌든 내 차례가 왔고 나는 단상에 올랐다.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문을 열었다.
“가을입니다.” 우렁차게 외치는 소리가 아니었다.
잔잔한 파장만 전해졌다.
그런데 그 순간 학생들이 “와!”하면서 웃어제꼈다.
그 한마디에 선거는 끝이 났다.
내가 당선될 것이라는 감이 왔다.
조회 후에 곧바로 투표가 이뤄졌고 결과도 금방 나왔다.
90%가 넘는 몰표를 얻어 내가 부회장에 당선되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결과 발표 후 국어시간에 선생님이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
“야! 박은석, 가을입니다?”
그리고 같이 웃으셨다.
선생님도, 나도, 우리 반 친구들도.
그렇게 나의 고교시절은 가을빛으로 채색되었다.
얼마나 고등학생 시절이 좋았으면 대학 1학년 내내 그리움에 절어 지낼 정도였다.
방학을 맞아 고향에 갔을 때도 고등학교를 찾아가서 교정을 둘러보고 오곤 했다.
내 고등학교는 ‘9월’의 단어로 또 ‘가을’의 단어로 여전히 내 마음에 남아 있다.
해마다 9월이 되면, 가을이 오면 그때의 고등학교가 생각난다.
친구들도 국어선생님도 다시 떠오른다.
입에서 ‘구월’, ‘가을’을 소리내보면 혀가 살짝 말아 올라가면서 기분 좋은 떨림이 온다.
구월이나, 가을의 낱말 끝에 있는 ‘ㄹ’ 발음 때문이다.
우리말에서 ‘ㄹ’을 발음할 때는 혀끝을 윗잇몸에 가볍게 댔다가 떼거나 아니면 혀끝을 윗잇몸에 살짝 댄 채 날숨을 양옆으로 흘려보내며 소리를 낸다.
시냇물이 장애물을 살짝 스치면서 흘러갈 때 나는 소리라 하여 이 ‘ㄹ’을 ‘유음(流音)’이라고 한다.
유음은 입 안에서 공기의 흐름이 살짝 막혔을 때 그 좁은 틈으로 흘러나오는 소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막힌 장애물 사이로 나는 소리가 나에게는 기분 좋은 떨림을 준다.
아마 내 고등학교 2학년 때 운동장에 모여 있던 친구들과 선후배들도 그랬을 것이다.
공부와 진로와 인생이라는 꽉 막힌 장애물 앞에 서 있었을 것이다.
그때 그 장애물 사이로 ‘가을’이라는 유음이 흘러간 것이다.
“가을입니다.”라는 말이 그들의 막힌 맘을 열었다.
그리고 실컷 웃었다.
오늘도 답답한 장애물을 만나면 그때 그날처럼 ‘가을’을 불러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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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석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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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2009년 1년 200권 읽기 운동 시작. 2021년부터 1년 300권 읽기 운동으로 상향 . 하루에 칼럼 한 편 쓰기. 책과 삶에서 얻은 교훈을 글로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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