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와 아들아이가 아직도 어린아이의 입맛을 버리지 못했다.
식사를 준비하는 아내의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밥을 제외하고는 식물성 반찬은 손도 안 댄다.
불고기를 내놓아도 고기만 쏙 빼먹는다.
라면 같은 것은 후루룩 먹으면서 김치는 안 먹는다.
짜장면을 시켜 먹을 때도 오직 짜장면만 먹는다.
단무지는 곧바로 음식물 쓰레기가 된다.
가끔 내가 식사 준비를 할 때가 있다.
혹 가다 한 번 오는 일이기에 별로 고민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입맛을 땡겨주는 메뉴를 내놓으면 된다.
고기를 좀 구워주든지, 집 앞에 있는 순댓국집에서 1인분 포장해서 나눠주면 둘이 잘 먹는다.
그런데 그렇게 기름진 것만 계속 먹을 수는 없다.
야채도 먹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잔소리를 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요지부동이다.
음식을 가리지 말고 골고루 먹어야 몸이 건강해진다.
누구나 다 알고는 있지만 아는 대로 실천하는 아이들은 많지 않다.
어디 먹는 것만 그런가?
사람을 만나는 것도 두루두루 만나야 대인관계가 좋아진다.
이런 사람도 만나고 저런 사람도 만나면서 사람을 더 잘 알게 된다.
지식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만 공부할 게 아니라 다른 분야도 공부하면 넓고 깊은 지식의 바다를 항해할 수 있다.
나에게 필요치 않다고 해서 쓸모가 없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어딘가에 다 필요하다.
마음에 떠오르는 갖가지 생각들도 언젠가는, 어디에선가는 쓸모가 있다.
뚱딴지같은 생각이 기발한 해결책이 되기도 하고 헛소리가 명언이 되기도 한다.
내가 살아온 날들도 마찬가지였다.
가슴 벅찬 좋은 일들은 나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다.
반면에 가슴 아픈 안 좋은 일들은 나에게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사람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넓혀주었다.
내가 경험한 모든 일들이 나의 마음과 몸을 살찌워주었다.
버릴 것이 없었다.
하나도 버릴 수 없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한때 도박에 중독되었던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형편없는 노름꾼이라고 손가락질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경험을 살려서 그는 <노름꾼>이라는 소설을 썼다.
그는 또 반정부 운동을 하다가 잡혀 사형을 당히기 전에 기적적으로 사면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때의 경험을 버리지 않고 소설 <백치>에 담아냈다.
브라질 작가 파울로 코엘료는 독실한 가톨릭 신앙인으로 성장했지만 젊은 시절에 마약을 했고 히피운동에도 가담했고 다양한 종교적인 체험들도 하였다.
그의 책 <순례자>나 <연금술사>에서 진리를 찾고자 몸부림쳤던 그의 고뇌하는 마음이 녹아 있다.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라는 책을 들었을 때는 제목처럼 그가 흘렸을 눈물들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모든 소설은 등장인물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 책을 쓴 작가의 생각과 삶과 인생의 이야기이다.
작가에게는 버릴 게 하나도 없다.
박경리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에 유고 시집이 한 권 나왔다.
시집의 제목이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이다.
사람이 떠나면서 남긴 것은 이제 버릴 것이 된다.
떠나기 전에는 버릴 게 아니다.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을 버릴 수 있는가?
버릴 수 없다.
오늘 내가 해야 하는 일을 버릴 수 있는가?
버릴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일도 버릴 수 없고 내가 싫어하는 일도 버릴 수 없다.
이번에는 꼭 버리려고 가지고 나갔다가 슬그머니 다시 가지고 들어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무엇인가를 버리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이것저것 다 끌어안는 게 훨씬 쉽다.
지금 당장은 필요 없어 보여도 언젠가는 필요한 날이 올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래서 지금도 이것저것 끌어 모으고 있고 여기저기 관심을 가진다.
그나저나 이것저것 먹어서 잔뜩 부풀어 오른 내 똥배는 어디에 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