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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Sep 27. 2021

책을 읽어도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고요?


어떤 사람은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줄줄 풀어낸다.

그런 사람이 있다.

한 번 봤다고 하는데 마치 대입 시험공부하듯이 그 내용을 꿰뚫고 있다.

책 리뷰를 잘 쓰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때는 리뷰가 책보다 더 나은 경우도 있다.

그런데 나 같은 사람은 책을 읽어도 무슨 글을 읽었는지 잘 모를 때가 많다.


책 읽기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는 1시간에 고작 50페이지 정도밖에 못 읽었다.

읽는 속도가 엄청 느렸다.

만화책도 진도가 안 나가기는 마찬가지였다.

애들은 금방 읽던데 나는 한 글자 한 글자 꼬박꼬박 읽었다.

당연히 시간이 오래 걸렸다.

시간을 많이 들인 만큼 잘 기억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그나마 조금 나아진 편이다.

1시간에 60페이지 이상은 읽는다.

내용을 기억하는 정도는 책에 따라 다르다.

어떤 책은 작가 이름도 기억이 안 난다.

책 속 등장인물의 이름도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잊어버리기도 한다.




특히 러시아 소설들은 사람 이름 외우다가 끝나버리기도 한다.

보통 이름이 두 개는 되는데 하나같이 발음하기가 어려워서 입에 붙지를 않는다.

이 사람이 그 사람인가 헷갈려서 전체적인 흐름을 놓치기도 한다.

딱딱한 학문적인 책들은 읽기는 어려워도 전체적인 틀은 그려진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집중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장황하게 내용이 전개되는 소설은 읽고 나서도 ‘도대체 내가 뭘 읽은 거지?’라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는 로버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책이 그랬다.

10권짜리도 있고 11권짜리도 있는데 번역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 같은 경우는 스무 권이 넘어도 사건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어서 내용을 따라 여행하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프루스트의 책은 이게 사건인지 등장인물의 머릿속 생각인지 모를 정도로 마구 뒤섞여 있다.

길 잃기 딱 좋은 책이다.




음악과 미술처럼 나에게 벽이 높은 분야의 책들도 있다.

수우미양가로 성적을 받을 때 미술은 늘 아름다울 ‘미’를 받았던 나다.

그림 그려서 상을 받은 것은 국민학교 1학년 때 한 번 그리고 언젠가 태극기 그리기 해서 한 번뿐이다.

음악은 뭐 막 듣는 귀니까 이게 누구의 무슨 곡이냐고 하면 대답할 말이 없다.

그러니 그런 분야의 책을 한 권 읽었다고 해서 기억나는 것이 남아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내가 도입한 방법이 있다.

비슷한 내용을 다룬 책들을 두 권 세 권 읽는 거다.

같은 책을 두 번 읽는 것은 싫증이 나지만 다른 책을 읽는 것은 마음에 든다.

독서 목록에도 한 권씩 올라간다.

책에서 소개하는 음악이 있으면 일부러 한번 들어보고, 그림이 있으면 찾아본다.

책 뒤에 나오는 작가 연보도 살펴본다.

그러다 보면 큼직큼직한 내용들이 눈에 들어온다.

책의 내용이 큰 틀에서 이해되면서 점차 작은 부분으로 내려온다.




어떤 이들은 “그 책에 이런 말이 나오지.”하면서 명문장을 이야기한다.

그들이 부럽기는 하지만 꼭 그들처럼 책을 읽지 않아도 된다.

읽은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도 괜찮다.

“로버트 프루스트 그 사람 진짜 어려운 책 썼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인가?

그래 나도 책 읽다가 시간을 잃어버렸나 봐.

그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

잊어버렸어.

그 첫 부분에 스완네 집인가 수완이네 집인가가 나와.”

이래도 괜찮지 않을까?


공부하기 위해서 책을 읽을 때도 있지만 책 읽기가 꼭 공부하는 시간은 아니다.

지식을 쌓기 위해서, 가르치기 위해서 등 여러 가지 목적으로 책을 읽을 수 있지만 책 읽기가 반드시 어떤 구체적인 목적을 가져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읽는 것에 만족해도 된다.

알고 보면 남들도 책을 읽고 나서 다 까먹는다.

그래도 읽고 또 읽다 보면 잊어버렸던 것들이 하나씩 기억난다.

그게 책 읽기의 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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