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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피할 게 아니라 짊어지고 가야 한다

by 박은석


사람의 마음이란 게 조삼모사(朝三暮四)이다.

아침에 다르고 저녁에 다르다.

눈에 무엇인가 보이면 출렁이고 귀에 무슨 소리가 들리면 요동을 치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공자는 나이 마흔에 더 이상 유혹받지 않았다며 불혹(不惑)이라고 했는데 나는 반백이 되었어도 매일 유혹을 받는다.

한순간이라도 마음을 붙잡지 않으면 내 마음은 자기가 가고 싶은 데로 마구마구 달려간다.

실컷 불평하고 신세타령하고 세상을 향해 욕지기도 한다.

시대를 잘못 맞춰서 태어났다며 시절 탓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는데 운명이 나를 여기까지 몰고 왔다고 생각한다.

참 가혹한 운명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운명론자는 아니기 때문에 사주팔자가 어떻다느니 같은 말은 하지 않는다.

대신 내가 믿는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께 투정을 부린다.

“하나님 저에게 혹시 감정 있으세요? 왜 이러세요?”

물론 하나님으로부터의 대답은 없다.




마음을 잡는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나 자신에 대해서는 괜찮다고 생각해도 옆에서 내 신경을 건드리는 일들이 일어난다.

그것들을 다 떨쳐버리고 멀리 떠날 수 있는 게 아니다.

설령 산속 깊은 데로 떠난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홀가분하지 않을 것이다.

이 복잡한 상황에 얽매여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나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운명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능사가 아니다.

오히려 나의 운명을 잘 받아들이고 어떻게든 그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

운명이란 놈은 딱 정해진 길처럼 나에게 선택의 자유를 빼앗지는 못한다.

비록 내 등에 무거운 짐은 되겠지만 내 발걸음은 내가 선택한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보폭은 얼마로 할지, 달려갈지 걸어갈지는 내가 선택한다.

운명은 내 등에 올라타서 내가 가는 길로 나를 따라올 수밖에 없다.

운명의 방해란 것은 가볍고 무겁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렇게 나의 마음을 다시 잡는다.




운명이란 말을 생각하면 음악의 성인(樂聖) 베토벤이 떠오른다.

‘빠빠빠빰!’하고 울려 퍼지는 교향곡 5번 <운명>은 세상에서 제일 잘 알려진 클래식 음악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그 음악보다 더 감동적인 것은 베토벤의 실제 운명, 그의 인생이다.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채 실패한 인생처럼 술에 절어서 살다 간 아버지, 어린 자식들을 두고 훌쩍 세상을 떠난 어머니, 가난한 집안 살림,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음악공부, 이십 대의 나이에 청력을 상실하고 깊은 우울증에 빠져들었던 사람이 베토벤이었다.

좀 견뎌보려고 했더니 이번에는 동생이 폐결핵으로 죽었고 어린 조카를 아들처럼 키워야 했다.

정작 자신은 결혼도 못했으면서 말이다.

조카의 양육권을 얻으려고 바람기 많은 제수씨와 싸워야 했고 조카가 자살 미수에 그치는 사고를 당하는 것도 바라보아야 했다.

그게 베토벤의 운명이었다.




그렇게 한 생애를 살았던 베토벤이 남긴 최후의 작품은 현악 4중주 16번이다.

4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꼭 봄여름가을겨울의 4계절을 듣는 것 같다.

베토벤에게 봄은 짧았고 여름은 고민과 갈등이 많았으며 가을과 겨울은 무겁고 길었다.

그렇게 생각해서 들어보니 베토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이 곡의 마지막인 4악장의 악보에 베토벤은 무슨 계시를 받은 것처럼 메모를 해 두었다.


Der Schwergefasste Entschluss. (고통스럽고 힘들게 내린 결심.)

Muss es sein? (꼭 그래야만 할까?)

Es muss sein. (그래야만 한다.)


그는 자신의 운명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맞서 싸웠다.

아니 그 무거운 운명을 짊어지고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선택하며 살아갔다.

그렇게 선택하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들었다.

다른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만 했다.

운명이여 오라!

나 이제 두렵지 않다!

(베토벤 현악4중주 16번 4악장 악보와 베토벤의 메모)


+++ 베토벤 현악4중주 16번(String Quartet No.16 in F Major, Op.135) 감상하세요.

https://youtu.be/iljQFHSkg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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