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80세 이상의 할머니들만 모인 모임에 기타를 들고 간 적이 있다.
내 어머니보다도 더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셔서 그분들과의 대화가 잘 이루어지는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하지만 같이 노래를 부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세대만 하더라도 학창시절에 동요를 부르고 가곡을 불렀기 때문에 노래로는 통할 것 같았다.
그래도 원체 연세가 많으셨으니까 가곡보다는 동요가 좋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중고등학교는 못 다니셨어도 국민학교는 다니셨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할머니들에 따라서는 소학교를 나오신 분들도 있을 것 같았다.
일제가 우리의 교육을 장악했어도 몰래몰래 동요는 불렀을 테니까 동요 몇 곡 부르자고 생각했다.
물론 할머니들에게는 그런 말씀을 드리지는 않았다.
그래도 기타를 들고 등장한 젊은 남정네를 보시고서 할머니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반겨 맞아주셨다.
어쨌든 환대를 받아 기분이 좋았다.
이러저러한 말씀들을 나누고 드디어 기타줄을 튕겼다.
내 기타 연주 실력은 연주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 왼손으로 코드 잡고 오른손으로 흔드는 정도이다.
그래도 대충 음감은 있어서 동요나 가곡 정도는 악보 없이 튕길 정도는 된다.
그날도 그것 하나 믿고 기타를 가지고 간 것이다.
할머니들은 무슨 노래를 부르나 말똥말똥 쳐다보셨다.
“뜸뿍 뜸뿍 뜸뿍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구두 사 가지고 오신다더니” 정말 오랜만에 불러보는 노래인데 내가 가사를 틀리지 않고 다 외우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푸른 하늘 은하수’도 불렀다.
‘동구 밖 과수원길’도 불렀고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도 불렀다.
지금은 노래 가사에 나오는 그런 경치를 보기도 힘들고 그런 정감을 느끼기도 힘들지만 노래를 부르는 내내 할머니들이 함께 합창을 해 주셔서 너무나 좋았다.
한 타임 노래가 끝났는데 어느 할머니 한 분이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다.
아까 노래를 부를 때 남편 생각이 났다고 하셨다.
그때가 언제였냐니까 당신 결혼식날이었는데 신랑이 언제 오나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저 멀리서부터 신랑이 말을 타고 왔다는 것이다.
그때는 너무 떨려서 신랑의 얼굴도 제대로 못 봤는데 어쨌거나 참 좋았다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아! 그때는 신랑이 말을 타고 갔구나! 말을 타고 갈 정도면 꽤 유복한 집 아들인데!’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연세가 몇이었냐고 여쭈었는데 열여덟 살이었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1926년생이시고 그 아드님은 1946년생이니까 열여덟 살에 시집가서 스물한 살에 아들을 낳으신 것이다.
21세기 초반의 우리에게는 독특한 일이지만 20세기 초반을 사셨던 분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노래 한 곡이 할머니의 신혼 초야를 떠올리게 해 주었던 것이다.
오늘 가까이 지내는 분께서 ‘뜸뿍 뜸뿍 뜸뿍새’의 노래가사를 누가 지었는지 아느냐고 여쭈셨다.
당연히 몰랐다.
지금까지 노래만 불렀을 뿐이지 누가 가사를 썼는지 누가 곡을 붙였는지는 몰랐다.
생각해 보니까 내 무식함이 부끄러웠는데 그 덕분에 최순애(1914~1998) 선생을 알게 되었다.
12살에 이 곡을 썼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가사에 나오는 서울로 간 오빠를 기다리는 과수원집 딸은 최순애 선생 자신이었다.
그리고 최순애 선생의 남편은 14살 때 ‘고향의 봄’을 작사한 이원수 선생이라는 사실도 오늘 알았다.
20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10대 나이에 시도 쓰고 노래도 짓고 시집도 가고 장가도 들었다.
지금 십대인 내 아들과 딸들에 비하면 대단한 십대들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노래 한 곡 때문에 많은 것을 얻은 날이다.
어느 할머니에게는 초야의 추억을 떠올린 노래가 나에게는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가져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