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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May 28. 2022

글쓰기에 대한 나의 자세를 생각해 보았다


미국의 작가 폴 오스터는 열예닐곱 살 때 이미 작가가 되기를 꿈꾸었다.

하지만 작가로 살아가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30대 초반이었을 때 그의 경제력은 바닥을 쳤고 글쓰기는 수렁에 빠졌다.

이혼을 했고 가난 때문에 공황 상태에까지 빠지기까지 했다.

글만 써서는 먹고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많은 작가들이 이중직업을 가지고 있다.

생계를 위한 본업은 따로 있었고 글쓰기는 부업으로 하고 있었다.

특히 작가들 중에 교사가 많았다.

교사는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좋은 직업이었다.

그런데 오스터는 그런 방법을 취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전업작가를 고집하였다.

그는 다른 직업은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지만 작가가 되는 것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되는 것이라고 했다.

왕권신수설을 주장했던 이들처럼 그는 작가라는 직업이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소명이라고 여겼다.




글 쓰는 것 말고는 어떤 일도 자기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평생 동안 멀고도 험한 길을 걸어갈 각오를 해야 한다고 했다.

글만 써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고 비바람을 막아 줄 방 한 칸 구하기도 힘들다고 했다.

여기저기 떠돌다가 굶어 죽기 딱 좋은 게 작가라고 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도 외진 간이역에서 폐렴으로 죽었다.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래했던 천상병 시인도 행려병자 취급을 받았었다.

시인 김소월, 윤동주, 이상은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겼지만 그들의 인생은 짧았고 비참하기까지 했다.

차라리 글을 쓰지 않았다면 편안한 삶을 살다가 갔을지도 모른다.

폴 오스터는 편안한 삶을 살려면 일찌감치 작가가 되기를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는 게 낫다고 했다.

하지만 자기는 글쓰기를 계속하겠다고 했다.

자기는 비록 가난하더라도 맘껏 글솜씨를 발휘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했다.




폴 오스터의 글을 읽으면서 ‘이 사람은 중독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글 중독자.

실제로 그를 조사해보니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글만 썼다고 한다.

도대체 한 문장을 몇 번 고쳐 썼을까?

컴퓨터로 작업하면 그나마 나을 텐데 평생 동안 타자기로 글을 썼다고 한다.

헤밍웨이는 일어선 채로 타자기로 글을 썼다고 하고 얼마 전에 별세한 이외수 선생은 글을 쓸 때는 자기 방의 문을 밖에서 잠그고 엎드린 채로 썼다고 한다.

가히 기인의 반열에 이르렀다고 해야 할 사람들이다.

좀 편안한 상태에서 글을 써도 될 텐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굳이 자기 자신을 불편하게 하면서 글을 썼다.

그게 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하루 한 시간 정도 깨작깨작 글 장난이나 하고 앉아 있다.

그러니 내가 쓴 글도 딱 그 수준이다.




글에는 나의 생각도 묻어나지만 나의 인생도 묻어난다.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고스란히 활자화되어 나타난다.

김훈 선생의 <남한산성>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감동받았던 부분은 머리말에서 그 책을 집필할 때, 날마다 남한산성을 한 바퀴 돌면서 산성의 돌들을 어루만졌었다고 이야기하는 대목이었다.

500년 전에 그 자리에 놓인 돌들을 만지면서 500년 전 사람들의 마음을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나타내지만 그 글 속에 자신이 직접 들어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을 작가로 택해주신 하늘의 뜻에 반응하는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숙명론, 운명론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일이라면 그 일을 대하는 나의 자세가 다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일일지라도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라고 외치고 목숨을 걸고 일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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