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내가 좋아하는 탈리스커 10년 한 병이 있다. '싱글 몰트' 위스키이지만 하나의 오크통에서 숙성된 원액 그대로 병에 담은 녀석은 아니다. 같은 증류소에서 같은 날 증류하여 같은 기간 숙성한 원액이라도 오크통의 종류, 보관 위치 등에 따라 차이가 생긴다. 예를 들어 새 오크통이냐 재사용이냐, 천장 가까운 곳에 보관하느냐 바닥 가까운 곳이냐에 따라 숙성 정도, 색깔, 맛과 향이 달라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소비자는 비용을 지불한 만큼 늘 일정한 맛의 위스키를 기대하고, 판매자 입장에서도 일정한 맛과 향을 유지해야 판매에 유리하므로 오래 전부터 증류소들은 여러 오크통에서 나온 원액을 섞어 제품으로 출시한다. 다시 말해 '싱글 몰트' 위스키라고 해서 하나의 오크통에서 숙성한 원액 그대로 병에 넣어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오크통의 원액을 섞고 물을 보태 도수를 맞춘 다음 병에 넣는다. '하이랜드파크' 홈페이지(highlandparkwhisky.com)에 보면 이를 'CASK HARMONISATION'이라 하고, 병에 넣기 전에 최대 150개의 오크통을 선택하고 혼합하여 한 달 정도 안정화시킨 후 병에 넣는다고 설명한다(FOR EVERY BATCH OF HIGHLAND PARK RELEASED, GORDON MOTION, OUR MASTER WHISKY MAKER, SELECTS AND MARRIES UP TO 150 CASKS, LEAVING THE NEWLY COMBINED WHISKY TO REST FOR AT LEAST A MONTH BEFORE BOTTLING). 이와 달리 하나의 오크통에서 꺼낸 원액만 병에 넣어 판매하는 경우 '싱글 배럴'이라고 표시한다. 일반적으로 더 고급이고 그만큼 비싸다.
그럼 탈리스커 10년은 10년 숙성 원액만을 사용할까? 그렇지 않다. 대부분 숙성 연도가 각기 다른 원액을 사용하는데 그 중 최소 숙성 원액이 10년 숙성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30년 숙성 원액을 99% 사용하더라도 15년 숙성 원액 1%를 블렌딩하면 '15년'으로 표기해야 한다. 시중에는 숙성 연도를 표시하지 않은 위스키(None Aging Statement : NAS)도 많은데 대개 숙성 연도가 짧은 원액이 들어가는 탓에 마케팅 측면에서 이를 표시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보기 때문이다. 와일드터키 8년은 최소 8년 이상 숙성된 원액을 사용했다는 뜻이고 블렛 버번은 8년이 안 된 원액도 들어 있다. 괜히 "블렛 버번 5년" 이렇게 표시하기 보다는 차라리 연수를 표시하지 않은 편이 낫다는 뜻.
그럼 NAS 위스키는 다 품질이 나쁜가? 그렇지 않다. 대표적으로 조니워커 블루는 오래 숙성된 원액을 사용하는 비싼 고급 위스키이지만 맛과 향을 위해 숙성 연도가 낮은 원액도 일부 사용한다. 그렇다고 조니워커 블루의 품질을 형편 없다고 할 것인가? 출시 10년도 안 되어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대만 위스키 카발란도 대부분 NAS 위스키이다. 대만은 덥고 습한 기후 탓에 위스키 숙성이 빠르다고 하는데 이런 경우에도 숙성 연도를 따로 표시하지 않는 것이 도리어 마케팅에 유리하겠다. 반면 히비키와 같은 일본 위스키들의 인기가 치솟으면서 물량을 대지 못하자 몇 년 전부터 NAS 제품들이 대거 나오고 있는데 사실 기존 라인업보다 더 나은 품질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면세점에서 히비키 이름만 보고 성급하게 구입하지는 말자.
그런데, 위스키는 무조건 오래 숙성하면 좋을까? 그렇지 않다. 스테인리스가 아닌 오크통에서 숙성하는 위스키 원액은 오크통의 성분이 오랜 시간 영향을 주면서 갈수록 원래 증류액의 특징은 점점 엷어지고 오크통의 영향력은 점점 커져 그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진다. 특히 새 오크통에서 숙성해야 하는 버번 위스키의 경우 오래 보관할 수록 오크통의 영향이 매우 커진다. 그럼 오크통의 영향을 오래 받으면 다 좋은 맛과 향이 날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꼭 그렇지는 않다. 증류소들은 저마다 추구하는 맛과 향이 있고 오랜 기간을 거쳐 그에 적합한 숙성 연도를 찾아내 제품으로 생산하고 있다. 글렌피딕 12년과 글렌피딕 18년은 그냥 서로 다른 술이지 18년산이 1.5배 좋은 술은 아니다. <Field Guide whisky> 에 "Age is a number, maturation is character"라고 썼던데 말 그대로 숙성 연도는 그 술의 '특색'일 뿐이다. <위스키 테이스팅 코스>의 표현도 재미있다. "위스키를 마셔보고 마음에 들면 사라. 연수에 신경쓰지 말고."
그렇지만 글렌피딕 12년보다 18년이 무조건 더 비싸지 않은가? 가격은 여러 가지 다른 조건에 따라 정해지기 때문에 그렇다. 우선 더 오래 숙성해야 하므로 당연히 비용이 많이 든다. 오크통 숙성의 경우 알다시피 자연 증발하는 부분 때문에 오래될 수록 그에 따른 손실도 발생한다. 해당 증류소의 생산량/재고량이 많으면 싸고 적으면 비싸다. 그리고 모든 상품 가격은 사실 마케팅 측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라가불린 8년이 탈리스커 10년보다 비싼 이유다. 그렇다고 라가불린 8년이 탈리스커 10년에 비해 절대적으로 더 좋은 술인가? 취향의 세계에 절대적인 기준이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