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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타벅 Jan 17. 2023

[로펌 일상] 2. 얼마나 바쁘세요?

사실 공무원은 일을 많이 하든 적게 하든 월급이 대개 똑같다. 성과급 비슷한 성격의 돈이 나오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일을 많이 한다고 월급을 더 주지는 않는다. 형사부 검사 시절에는 늘 넘치도록 일이 많았다. 매월 월말 기준으로 처리 못하고 들고 있는 사건 수를 따졌기 때문에 정말 '전쟁 같은' 월말을 치르고 나서 한숨 돌리는가 하면 어김 없이 한 가득 사건 기록들이 몰려와 잠깐 비웠던 캐비넷을 다시 채웠다. 법무부나 청와대 같은 기획부서에서 근무할 때는 솔직히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안 시켰으면 하는 때도 있었다. 그래도 한 달이 지나면 또 월급이 나왔다.


로펌은 다르다. 사람마다 계약 조건이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일이 많으면 수입도 많고 일이 적으면 당연히 수입도 줄어든다. 규모가 큰 로펌에서 일하면 공무원 비슷하게 ‘안정적’이겠지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만 쓰임이 없는 변호사를 계속 먹여살릴 회사가 어디 있겠는가? 정년제도가 있는 로펌도 있지만 정년이 없어도 일이 없으면 사실 계속 근무하기가 쉽지 않다. 공대 출신 내 아버지는 ”변호사는 평생 할 수 있는 직업“이라며 부러워 했지만 지금 변호사는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지 보장되지 않는 많은 직업 중 하나일 뿐이다. 이제 하루 종일 아무도 나를 찾지 않으면 슬슬 불안해진다.




그래서인지 여기서는 “식사는 하셨어요?”, “요즘 어떠세요?” 대신에 “바쁘지?“, ”얼마나 바쁘세요?“, “요즘도 바쁘시죠?”가 인사다. 그런 인사를 받으면 백이면 백 “아닙니다”, “하나도 안 바빠요”, “고만고만합니다” 정도로 점잔을 빼는데 일이 많은 사람은 뿌듯한 표정이 슬쩍 드러나고, 실제로 일이 없는 사람은 왠지 모를 자괴감이 얼굴에 스친다. 여기서는 ‘바쁘다’가 곧 능력이고 ‘바쁜 사람’이 능력자다. 주말이라도 일요일 오후 정도에는 사무실에 출근해야 제대로 된 로펌 변호사라는 소리도 하곤 했다. 의뢰인 입장에서는 자기 변호사가 여유를 갖고 자기 사건에 최선을 다해주면 더 좋을텐데 어떤 의뢰인들은 반대로 여러 사건으로 바쁜 변호사가 능력 있는 사람이라며 사건을 맡기려고 하고, 그걸 아는 어떤 변호사들은 괜히 더 바쁜 척 티를 내기도 한다.


그런데 실제로 그 변호사가 바쁜지 안 바쁜지는 본인만 제대로 안다. 물론 사무실마다 변호사들을 평가하는 지표나 기준이 있겠지만 저마다 능력의 크기가 다르니 실제로 바쁜지 여부는 본인 말고는 잘 모르고 특히 동료 변호사가 정확히 판단하기는 더 어렵다. 이렇다보니 로펌에서는 ’바쁘다‘라는 말이 때때로 다양한 의미로 쓰인다. 어떤 일을 요구 받았을 때 “제가 요즘 너무 바빠서…”라는 말은 하기 싫다는 뜻이고, 어떤 변호사를 추천 받았을 때 “그 친구는 요즘 너무 바빠서..”라는 말은 대개 그 변호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 달 전에 잡혀 있던 점심 약속에 급한 일정이 생겼다며 나오지 않는다면 그 모임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일 수도 있다.




정신과 의사 하지현은 ‘대한민국 마음 보고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 우리는 바쁘다는 사실을 통해 사회적으로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시간에 쫓기는 바쁜 사람은 부러움이 대상이 되었고 곧 성공한 사람이자 중요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숨 가쁘게 살다보니 살짝 여유가 생기면 숨통이 트이거나 기분이 좋은 게 아니라 도리어 겁이 난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여유는 빈틈 같은 붕괴의 조짐이라 여겨진다.” 꽤 오랫동안 내 마음도 그러했다. 정신 없이 바쁠때는 힘들다고 불평하다 막상 좀 한가해지면 슬슬 불안해지고 나중에는 점점 무기력해지고 짜증스러웠다. 왜 저 사건에는 나를 끼워주지 않는지, 나보다 능력 없는(없어 보이는) 저 변호사를 더 써주는 이유는 뭔지, 이럴거면 나를 왜 채용했는지, 내가 이 사무실에서 몇 년이나 버틸 수 있을지… 온갖 잡념들이 끝도 없이 머리 속을 돌아다녔다. 일이 많을 때는 일 때문에 지치고, 일이 없을 때는 불안감과 무기력으로 지치는 일상이 꽤 길었다.


생각해보면 변호사가 바빠지는 것은 노력과 의지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내 전공 분야가 사회적으로 이슈가 안 되는 시절도 있을테고 나 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입사해서 내 입지가 줄어들 수도 있다. 반대로 나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큰 사건이 일어나 사람이 모자라거나 유능한 사람이 사무실을 떠나 그 일까지 맡게 되는 경우도 물론 있다. 결국 나는 바쁠수도 있고 한가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상당 부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문제는 바쁘면 스스로 잘났다고 느끼고 반대로 한가하면 무능하다고 느끼는 내 마음 아닐지. 그리고 그 마음은 결국 다른 사람의 시선과 기준에서 스스로를 평가하기 때문은 아닐지.


유창선은 '나를 찾는 시간'에서 "우리는 너무 많은 생각들을 외부에 의존하는데 길들여진 것이 사실이다. 내가 사는 의미가 나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가치에 의해 주입되고 이입된다. 많은 부와 높은 지위, 화려한 명예를 선망하거나 그리는 나의 생각은 사실은 나의 것이 아니라 세상이 만들어 내게 입한 기성복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내 몸에 안 맞아도 억지로 입어야 한다. 사회가 요구한 성공의 기준에 나를 맞추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며 살아야 한다. 옷을 나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옷에 맞추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 되고 있다."라고 썼다. 스스로를 다른 사람의 기준에 따라 평가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불행하다. 바쁘지 않다고 푸념하며 사무실과 다른 변호사들을 원망하기 전에 내가 정말 바쁜 삶을 원하는지, 바쁠 때 내가 얻는 것은 무엇이고 잃는 것은 무엇인지, 나는 어떨 때 진정으로 행복한지 찬찬히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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