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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담파담 Feb 08. 2022

첫 출근부터 겁먹으면 안 되는데

주니어 PM의 스타트업 적응기 #1

어제 첫 출근을 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출근'이라는 것을 처음 한 것은 아니다.

20살부터 아르바이트를 꾸준히 했고, 작년 하반기에는 인턴 생활도 살짝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출근은 느낌이 달랐다.

스스로 안정적인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위치로 출근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두려움 반 설렘 반(사실 두려움 99, 설렘 1)으로 출근길에 나섰다.


사실 출근하는 날 아침까지 진짜 출근한다는 느낌이 잘 오지 않았다.

전날까지 병원 검사를 받고, 검사에 사용했던 기기를 아침에 일찍 반납해야 했기 때문이다.

9시까지 출근인지라 일정이 살짝만 꼬이더라도 지각할 것 같다는 걱정 때문에 급하다는 생각이 앞섰다.

다행히 계획대로 늦지 않게 병원에 도착해 출근에는 지장이 없었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지각은 면했다는 안도감에 출근이라는 부담감이 섞여 한 번에 몰려왔다.

지금까지 내가 경험했던 모든 일들은 아르바이트, 인턴과 같이 조직 내에서 책임감이 덜한 위치에 있었다.

그렇다고 모든 일에 책임감을 가지지 않고 임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슈가 발생하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나는 알바니까', '나는 인턴이니까'라는 생각으로 위안 삼았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정규직으로서 내가 하는 의사 결정이나 행동에는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막중한 책임감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PM은 미니 CEO라는 말이 있듯이 의사 결정에 있어서 다른 직군보다 비교적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생각에 두려움은 커져만 갔다.

인턴에서 했던 서비스 기획은 맛보기 수준이었기에 내가 회사에서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있지도 않을뿐더러, 자신 있게 '이건 제 전문 분야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20분 내내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고자 노력했지만, 모든 생각의 끝은 '난 못할 거야'였다.

그동안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친구나 여자 친구에게 그렇게 생각하면 할 수 있는 것도 못한다며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자신 있게 말했던 지난 내 모습이 가소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온통 두려움으로 뒤섞인 출근길을 뒤로하고 회사에 도착했다.

이미 면접 보러 2번이나 회사에 가 본 경험이 있어 헤매지 않고 잘 도착했다.

그동안(그래 봤자 2번이지만) 회사의 오후 모습만 봤었는데 고요하고 살짝 가라앉은 듯한 아침 분위기는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웰컴 메일에 적혀있던 대로 회사 내 카페테리아에 앉아서 기다리는데 3분도 안되어서 담당자님이 내 자리로 안내해주셨다.

2명이 써도 충분할 듯한 넓은 책상에, 3개나 되는 모니터가 내게 주어졌다.

양 옆 자리는 모두 비어있어서 탁 트인 공간에서 일할 수 있었다.

좁아터진 자리에서 인턴 생활을 하다가 이렇게 넓은 공간에 좋은 환경이라니 역시 회사는 돈을 잘 벌어야 하는구나 싶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담당자님은 컴퓨터 로그인 과정을 안내해주셨다.

너무 긴장한 탓인지 버벅거려서 로그인을 3번이나 실패한 뒤에야 로그인을 할 수 있었다.

에일 듯한 영하의 날씨에도 삐질삐질 나오는 식은땀을 애써 무시한 채 '입사자 TO DO LIST'를 살펴보았다.

입사자 TO DO LIST는 꽤 체계적으로 작성되어 있어서 조금 놀랐다.

'여기 스타트업이라면서 체계가 이렇게까지 잡혀있다고...?'

내가 경험했던 스타트업은 체계는커녕 체계를 만들어보자는 의견조차 묵살되던 곳이었기에 저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아무리 체계가 잘 잡혀 있는 회사에서도 제로베이스의 신입이 적응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이번에 입사하게 된 회사는 살면서 처음 들어보는 '위키', '지라' 툴을 사용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애자일하고 린하게 업무를 진행하기 위해 해당 툴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TO DO LIST에는 친절하게 위키와 지라 사용법이 적혀있었지만 글로만 이해하기는 너무 어려운 툴이었다.

지금껏 사용했던 슬랙이나 노션, 그리고 구글 앱들이 얼마나 간단한 툴이었는지 그때서야 깨달았다.

그래도 업무에 실제로 사용하다 보면 사용하는 법은 어떻게든 익힐 수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두려운 마음을 다독였다.


오전 시간 동안 정신없이 TO DO LIST를 살펴보고 입사에 필요한 작업(인사기록카드, 소득세 감면 신청 등)을 진행했다.

오후부터는 프로덕트팀의 신규 입사자를 위한 OJT가 준비되어 있어 나와 같이 입사하게 된 프로덕트 디자이너 분과 함께 미팅룸으로 향했다.

그때부터 멘붕의 연속이었다.

분명 신규 입사자를 위한 OJT인데 경력자들만 알고 있는 용어를 사용해서 진행했다.

(나와 함께 입사한 프로덕트 디자이너분은 10년 경력자라고 하셨다. 회사 내 쌩 신입은 나뿐이다.)

개발자와 소통하거나 회의에서 모르는 단어가 나오더라도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겠다는 면접에서의 포부가 무색하게 적극적인 자세를 취할 틈 자체가 보이지 않았다.


퇴근한 뒤 친구 붙들고 신세한탄


OJT가 진행되는 내내 집중은 하나도 되지 않았다.

앞으로 내가 참석할 모든 회의나 내가 담당하게 될 스쿼드에서 저 많은 용어들을 다 사용할 것이라는 걱정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장차 PM은 회의에서 주도적인 자세로 임해야 할 텐데, 주도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때부터 겁을 먹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로 회사에 들어온 게 아닐까?'
'대체 내가 여기서 뭘 할 수 있지? 아니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앞에서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시니어 PM분이 이런 내 생각을 알아챘는지 내게 질문이 있느냐고 물었다.

뭐 하나라도 이해를 해야 질문을 할 수 있을 텐데, A부터 Z까지 모르겠어서 내가 뭘 모르는지도 몰랐기에 없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Staging 사이트가 뭔지 알고 있냐는 질문에 모른다고 답변했더니 모르면 질문을 해야지 왜 가만히 앉아있냐고 하셨다.

(Staging 사이트는 유저에게 노출되기 이전에 개발적으로 문제가 없는지 최종 테스트할 수 있는 공간이다.)

평소에도 조금만 민망한 상황이 오면 얼굴이 새빨개지는데 어김없이 얼굴에 불이 확 오르는 게 느껴졌다.

귀가 제일 빨갛게 되기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옆사람은 분명 내가 민망해하는 걸 봤을 거다.

주니어이기 때문에 모르는 것은 적극적으로 물어봐야 했지만, 물어보는 행동 자체도 용기라던가 생각을 빠르게 정리할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에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는 내가 모르는 것을 질문하기엔 어려움이 컸다.

질문도 멋들어진 질문만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서 더욱 그랬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때부터는 질문도 제대로 못하는 내가 이 회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아직 계약서도 안 썼는데 퇴사하겠다고 말해볼까?'
'미친 것처럼 보이겠지만, 오히려 내가 그만두는 게 회사 입장에서는 더 좋은 게 아닐까?'

암만 그래도 퇴사는 아닌 것 같아서 금방 했던 미친 생각을 뿌리치고 어떻게든 버텨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첫 출근부터 겁먹으면 안 되는데"

하지만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건 이미 겁은 잔뜩 먹었지만 그래서는 안된다고 계속 되뇔 뿐이었다.


폭풍 같은 OJT가 끝나고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빠르게 처리하면서 업무에 적응해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OJT가 끝나고 자리에 앉자마자 했던 일은 개인적인 TO DO LIST를 새로 만드는 일이었다.

위키 사용법도 알아갈 겸 TO DO LIST를 만들고 갱신해나간다면 업무에 조금 더 잘 적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내 사수인 시니어 PM은 업무와 관련된 피드백을 매우 효과적으로 주는 사람임이라고 판단했기에 내가 작성한 위키를 통해 어떤 방식으로 업무를 파악하고 적응해 나갈 건지 보여준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매번 찾아가서 질문하기 어려워서 그냥 먼저 알아봐 주고 피드백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더 크다.)




다른 회사에서 서비스를 기획하고 있는 친구가 해준 위로


사실 친구가 해준 위로가 100% 맞는 말이다.

회사에서는 생각보다 나에게 많은 것을 바라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주니어 PM이라 칭하며 쥐뿔도 없는 사람을 앉혀다가 업무를 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너무 많은 것을 혼자 떠안고 혼자서만 끝장을 보려는 것 같아요. 그러지 마세요."

지난 인턴에서 과도한 업무로 인해 인사팀장님한테 울면서 상담했을 때 들었던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나한테 큰 것을 바라고 있지 않다.

내가 괜히 남들의 눈치를 보며 빠르게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릴 뿐이다.


퇴근 후 집에 와서 마음가짐을 조금 고쳐먹었다.

"첫 출근부터 겁먹으면 안 되는데"

같은 말이지만 오후에 했던 생각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회사보다는 내 성장이 더 중요하다.

내 성장을 위해서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보이는 결과에만 연연해서 겁부터 먹지 말고, 내일의 나는 출근이나 잘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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