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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의 발단

뉴욕-서울

by 쥬링

스무 살이 되면 대부분 사람은 봄날에 핀 어린잎처럼 싱그러운 마음가짐이 생긴다. 10대라는 불완전함을 벗어던지고 모두가 새로운 출발선에 나란히 올라 시작을 꿈꾸니까. 그러나 나의 스무 살은 조금 달랐다. 나는 중도 포기자가 되기로 선언했다. 무대에 올라 연기하고 싶어 하던 한 아이가 우연한 기회에 오디션에 합격해 아이돌 연습생 계약서를 쓰러 회사에 갔던 한 날을 시작으로 모든 게 달라졌다. 나는 치열하게 살아남는 법과 소중한 사람과 이별하는 법, 그리고 사랑받는 법을 배웠고 한 가지의 모든 것을 쏟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 사회에서 명확하게 습득할 수 있었다. 뒤돌아보면 너무 가치 있던 시간이나, 정작 누구의 희망인지 모를 일에 최선을 다해 살아온 것은 아닐까 싶다. 어느 날 뇌리에 박힌 본질적인 질문에 모든 것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게 뭔데?’


꿈을 태운 잿더미 속에서 그나마 쓸 만했던 것은 배우다 만 중국어. 뭐든 남겨야겠다는 생각으로 당시 HSK 4급 자격증 시험을 준비했고 나는 첫 시험에 간당간당 턱걸이로 합격했다. 그렇게 첫 직장을 면세점에 있는 한 명품 브랜드로 가게 되었다. 이 또한 처음부터 하려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잡코리아의 현혹에 순순히 넘어갔달까). 동료들은 내가 중국어 전공자가 아님에도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것에 굉장히 놀라워했다. 나조차도 이 모든 기회가 내게 오기까지 많은 운이 따랐다고 생각한다. 무의 상태임에도 면접만 가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밝은 에너지를 뿜어내며 면접관에게 신뢰를 주었으니까. 어느 날 아랍계 외국인 고객이 매장에 방문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영어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으로 이어지는 딱딱한 교육에서 벗어나 실제로 사람들이 쓰는 말, 영어가 말이라는 것을 정확히 느낀 것이다. 나는 당시 아랍계 외국인을 케어한 선배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한 달간 다녀온 어학연수 경험을 부끄럽게 꺼내며 자기도 영어를 잘 못한다고 말하는 그녀. 나는 그 선배가 너무나 멋있어 보였다. 중국어와 영어, 두 언어 중 하나를 선택해 배워보자고 마음먹었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몸만 한 캐리어를 끌고 호주로 떠났다. 한국 나이로는 스물두 살, 국제 나이로는 스무 살. 나의 뒤늦은 스무 살이 멜버른에서 시작되었다. 혼자 하는 여행에 익숙해진 것은 이때부터다. 무엇보다 삶을 대하는 태도와 사고방식이 긍정적으로 변화했으며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며 내향형 인간인 내가 외향적 기질이 고루 섞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로 줄곧 해외에서 머물던 나날을 그리워했다. 이는 곧 이방인으로서 언제든 방랑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브루클린 브릿지 너머 보는 맨해튼

또 다른 도전을 위해 홀로 뉴욕에 머물고 있던 때다. 어느 새벽, 마테오가 오랜 안부를 묻는다. 그와 나는 사제지간이며, 그는 기숙사 사감 선생에서 어느새 캠핑과 해외여행 투어를 전문으로 하는 사업의 대표가 되어 있었다. 그는 거두절미하고 유럽 패키지여행에, 그것도 여학생 담당 인솔자라는 자리를 제안한다. 나는 고민한다. 우선 급여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할인의 개념이었고, 그 말은 돈을 지불하고 여행에 참여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나는 혼자 하는 여행의 이점을 즐기는 사람인 걸?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있지만 아무래도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한 달안에 여러 국가를 가볼 수 있다는 것과 나는 유럽이 처음이라는 것. ‘내가 언제 이런 일을 해보겠어’라며 그에게 메시지를 남긴다.


“좋아요!”


좋아하는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추진력이 강한 사람이다. 타인의 시선에 비치는 내 모습은 거침이 없나 보다. 나는 그저 남들보다 모험심이 조금 더 강하고 마음의 여유가 있으며 낙천적일 뿐이다. 동경하는 모습을 상상하다 보면 어느새 원하는 방향에 닿아 있다. 그뿐이다.



한국에 돌아와 시차 적응할 새도 없이 또 다른 여정을 위해 e-sim을 구매하고 아이클라우드의 용량을 업그레이드한다. 그동안 수많은 재즈 음악이 나를 지구 반대편 어느 장소로 늘 데려다주었는데, 이제는 세상을 마주할 때가 된 것이다! 사진으로만 보던 도시의 단편을 직접 눈에 담을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속에 잔잔한 기쁨이 일렁거리다가도 장거리 비행을 또다시 해야 한다는 배부른 걱정이 밀려온다. 이쯤 되면 인간의 양면성이 나에게만 있지 않길 바랄 뿐이다. 걱정이 하나 있다면 인솔자가 된 나의 모습이다. 일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사촌 동생은 슬라임과 유튜브에 관심 있는 초등학생이며, 소위 말하는 요즘 애들(청소년)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잔열 같은 불안이 몸에 남는다.


하도 큰 캐리어만 끌고 다녀서 이제는 다소 작게 느껴지는 24인치 캐리어를 거실에 펼쳐두고 짐을 꾸린다. 옆에서 TV를 보던 오빠에게 장난스레 여행 얘기를 꺼냈다.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나 (여행 가서) 애들한테 기 빨릴 것 같아.

오빠 애들 기를 네가 받을 수도 있지.


덤덤한 오빠의 대답이 홈런을 친다. 나의 소리 없는 함성과 박수가 관중석을 가득 메운다. 여행 준비가 마무리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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