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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존재만으로 충분한

리스본

by 쥬링

스페인에서 포르투갈로 향하는 여정에는 장거리 이동이 필수적이다. 이동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잠이 늘어가고 엉덩이가 으깨질 듯이 뻐근해지기 마련인데, 사실 이 시간을 단순히 목적지로 향하는 움직임에 그치게 한다면 여행이 재미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양한 찰나의 순간을 길에서 마주칠 수 있다. 이러한 순간들은 어느 순간 한 칸 한 칸의 필름으로 남아 머릿속에서 현상될 것이다. 내게는 빼곡히 늘어선 올리브나무와 붉은 토양, 바위 위에 앉아 있던 말과 작은 망아지가 있던 평야가 그러하다.


리스본에서는 라즈베리를 좋아하는 공작새를 만나고, 에그타르트의 진수를 맛보고, 고운 파스텔 색이 도시와 어우러져 많은 사진을 남기며 다녔다. 무엇보다 비버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었다. 대체로 혼자 돌아다니는 내가 마음이 쓰였는지, 모아나가 K와 함께 다녀서 이제는 같이 다닐 친구가 없다고 생각한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비버와 함께 시내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나는 포르투갈의 유명 정어리 통조림을 판매하는 회전목마 컨셉 상점에 가서 그의 사진을 찍어주었고, 그는 팟타이를 먹고 싶어 하는 나를 따라 포르투갈에서 태국 음식을 먹었다. 하필 내가 구글맵에서 찾아낸 식당이 테이크아웃 전용 식당이었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팟타이, 똠얌꿍, 타이 밀크티를 포장해 근처 벤치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다행히 음식 맛과 날씨는 완벽했다. 나는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팟타이를 아주 천천히 먹으며 따사로운 리스본의 겨울 낮을 즐겼다. 비버와 나 사이에는 중학교 졸업 이후부터 지금까지 라는 오랜 공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새로 사귄 다른 친구들보다 그와 있을 때 한결 편안함을 느낀다. 친구라는 존재는 대단하다. 특히 학창 시절을 함께한 친구는 더욱 각별하다. 학교, 같은 반이라는 이유 말고 우리가 엮여야 할 이유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친구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사회생활에서는 명확하게 선을 긋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도 틈을 내어주지 않고, 적당한 친절을 둘러대며 개인주의 성향을 버리지 못하게 된다. 직장이라는 공통분모가 사라지면 관계도 끝난다.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되어주기에는 모두 여유가 없고 박한 세상인 걸까.


아이들도 조금씩 여행자의 면모를 드러내며 자유 여행을 즐긴다. 친구들과 함께 어느 방향으로 걸을지, 무엇을 먹을지 정하며 서로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깔깔댄다. 우리는 자유 여행을 할 때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단톡에 사진과 함께 공유하고는 했는데, 아이들의 발전된 모습은 나의 심금을 울렸다. 친구의 소중함을 아직 잘 모르겠지만, 20대가 된 내가 생각했을 때도 학창 시절 만난 친구는 너무도 값지고 소중하다. 못 생기고(?) 어리고 발랄한 나의 과거를 홀라당 벗겨 먹을 수 있는 사람, 나 또한 똑같이 벗겨 먹을 수 있는 사람. 친구라서 가능한 것이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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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라즈베리를 먹는 공작새, (우) 벨렝탑의 야경


낮의 태양이 저물고 밤이 되자 겨울을 실감 나게 하는 세찬 바람이 불어온다. 벨렝탑(Torre de Belém)을 보기 위해 렌터카에서 내렸지만 너무 춥다. 맨투맨만 입은 비버는 그다지 춥지 않다며 나에게 자신의 패딩을 넘겼고, 나는 비버의 패딩을 이불처럼 걸치고 벨렝탑 앞에 있는 공원을 뛰기 시작한다.


왜 뛰어?

추워서. 좀 뛰어야겠어.


비버는 나와 함께 뛰기 시작한다. 얼마 뒤 그가 카메라를 켜고 뛰고 있는 나를 옆에서 찍기 시작한다.


임주희 씨, 인터뷰 가능하십니까?

(카메라를 발견하고) 네. 가능합니다!

임주희 씨는 맨날 이렇게 (헥) 벨렝탑 근처 공원을 뛰나요?

네~(헥헥) 밤, 밤에 자주 뛰곤 합니다.

(웃으며) 매우 지쳐 보이시는데요.


우당탕탕 웃는 우리들. 친구란 서로의 폭소에 동참해 주는 존재일까. 영상은 다이내믹하게 흔들리며 생동감이 넘치고 그와 나의 웃음소리가 벨렝탑까지 함께 달려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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