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시대의 주체는 보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사라져. 아니, 사라지지 마.
24시간 동안 살아 있다가 사라지는 이야기마저도.
가끔 스토리를 올린다는 게 나의 존재 여부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고, 이런 하루를 보냈다고, 관심을 가져달라고 불특정 다수에게 이야기하는 느낌이랄까. 사실 친한 친구 기능으로 관심받고 싶은 사람들에게만 나를 표현하는 게 더 자연스러워졌달까.
나의 존재, 정확히는 프레임 속 존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어떨까 하고 상상한다. 실재하는 모습과 미디어 속 페르소나의 갈등을 상상할 때면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페르소나가 죽음을 맞이한다면, 나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을까? 어떻게 내가 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 지금으로서는 어디서든 잊혀질 게 분명해서, 나는 그들에게 잊혀지고 싶지 않아서 자꾸 내 하루를 사진과 글로 보여주는 것 같다. 어쩌면 스스로 존재를 증명하는 하루 단위로 확장된걸 수도 있고.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잠재하던 어느 날, 오랜만에 열을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열은 연합동아리에서 알게 된 동생이다. 캐릭터도 참 특이한 게 동아리 활동에 늘 참석하지만 꾸준히 늦게 온다. 모든 지각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고, 그렇게 빡빡한 스케줄을 보냈으면 쉴 법도 한데 쉼보다는 만남을 택하는 사람이었다. 열은 왜 늦게라도 꼭 모임에 등장했을까. 그런 열의 존재는 모임 내에서 꽤 단단했다.
1학기 마지막 모임을 마무리하는 그날도 열은 단단히 지각을 했다. 수빈과 루리와 내가 모임이 끝난 뒤 카페로 향하는 길에 열이를 마주쳤고 열은 마시지도 않은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카페에 따라왔다. 채 마시지 못한 커피는 급하게 입 속으로 버려졌다. 수빈과 열이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것을 지켜보며 빈 속에 커피를 마셨다.
냉우동집으로 향하는 길, 우리의 대화 주제는 '사는 곳'(나와 열은 어디에 사는지 이미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이었다. 나는 얼마 전 만난 오랜 친구와의 대화가 갑자기 떠올라서 나는 10년째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데 오랜 친구는 아직도 내가 어디에 사는지 묻더라~ 나는 그 친구가 잠실에 사는 걸 기억하는데 섭섭했다~ 근데 막상 섭섭했다고는 말도 못 했다~ 는 이야기를 하던 찰나에 열은 "저는 기억해요, 아현."이라는 짧은 문장을 내뱉었다. 나는 아현이라는 동네 이름이 나조차도 낯설 때가 있어서 늘 '이대 옆에 아현'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곤 하는데 열이 단번에 '아현'이라고 말하는 것에 놀랍고 약간의 감동도 있었다. 나는 뒤이어 ".. 그래서 열이 잠실 사는 건 잊지 않았다"라고 말했는데, 열이 감동이라고 했나 고맙다고 했나. 두 표현 다 들었던 것 같다. 사람이 좋아서 여러 모임을 병행한다는 열은 똑똑하고 섬세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달 전 함께 추천받은 소설 <공룡의 이동 동선> 이야기를 할 때도 그랬다. 열은 내가 어느 대목까지 읽었는지를 물었고 나는 1/3 정도 읽었다고 답했다(다시 보니 절반 정도였다). 소설을 옴니버스로 구성되어 각 인물이 조명되는데, '소설에 주희 나오던데'라고 웃으며 말하니 "아, 맞아요. 저도 주희님 생각났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주희가 나오는 대목을 읽기 전이었어서, 대수롭지 않게 열의 문장을 넘겼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서 미뤄뒀던 소설의 뒷 이야기를 호로록 다 읽어버렸지만.
소설 속 주희는 희한하게 나와 닮은 구석, 내가 닮고 싶은 구석이 있는 인물이었고 그래서 읽는 내내 나 또한 주희라는 이름에 마음이 갔다. 동명이인이라는 게 이렇게 감정 이입이 잘 될 줄 몰랐다. 특히 애인 현우가 주희를 좋아하는 이유를 나열한 구간이 좋았는데, 주희는 애니메이션에 귀여운 공룡이 '얍얍얍'하듯 귀엽고 사랑스러운 인물이었다. 소설을 읽다 보니 주희라는 이름만으로 내가 생각났다는 열에게 늦은 고마움이 들었다. 그와 나의 사이를 '우리'라고 표현하기에는 아직 먼 사이랄까. 아직 완전히 친해지지 못한 이 관계 안에서 그가 나를 기억하고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내게 어떤 의미인지.
"프레임 속 페르소나가 소멸해도 누군가의 기억에 내가 잠시 머무를 수도 있겠구나"라는 희망이 생겼달까. 잊힐 거라는 두려움은 멀리 두고 잠시 사라져도 괜찮을 것 같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