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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 불감증

by 쥬링

비를 몰고 오는 바람이 창문 위로 걸쳐진 블라인드를 불규칙적으로 흔든다. 어둑한 방안. 창문 밖으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

화재 경보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와 블라인드가 벽을 치는 거슬리는 소리에도 눈만 뜬 채 몸을 일으키지 않는다.

‘안전 불감증 자극하는 거야 뭐야.’


지난밤을 찬찬히 뜯어본다. 내가 왜 울었지. 더 솔직할 수 있던 말이 이제야 떠오른다.

‘그때는 제가 가지고 있던 감정을 말하면 지난 마음이 다 정리가 될 줄 알았어요.’

여전히 앞뒤 맥락 없이 터져 나온 나의 언어에 그의 몸이 의자 뒤로 쑥 들어간다. 나의 서툴음은 그에게 늘 당황만 남긴다. 무대에 오른 모습이 사람대 사람으로서 멋있었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었는데. 나는 참 담백하지 못하다.

글을 한번 제대로 써보고 싶다고, 내 안에 잔류하고 있던 따끈한 마음을 꺼내어 본다. 그는 그의 방식으로 나를 응원한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아주 조금은, 타인보다 더, 나를 이해해 줄 거라고 느꼈던 모양이다. 나는 어디서 그런 영감이 피어났는지 새벽빛 새들이 재잘대는 것마냥 마구 말을 쏟아냈다. 가뜩이나 피로한 그에게 더 큰 피로를 얹은 게 아닐까.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요 며칠 나의 얕은 호흡법에 드디어 문제가 생겼나 싶을 정도로 집중이 안되고 호흡에 불편감이 가슴을 답답하게 했던 적이 있다. 나는 소화제를 우겨넣고 짧은 산책을 하기도 했는데 간밤의 만남 이후에서야 비로소 숨을 되찾았다. 술을 이용한다는 말이 많이 아팠지만, 지나고 생각해 보니 그의 솔직함이 맞다. 우리는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너무나도 다른 개개인인데 한 번도 대화를 깊게 나눠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어떠한 관계라도 깊은 대화는 늘 옳다.

‘저는 술을 좋아하지만 소주는 잘 못하기도 하고 좋아하지 않아요. 당신이 좋아하니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아도 당신을 만날 수 있어요.‘

나는 또 한 번 솔직하지 못했다.

관계에 있어서 아픈 말을 들으면 소라게처럼 몸을 쏙 숨겨버린다. 나야말로 천성이 회피형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는 데미안의 한 구절처럼 많이 깨트리고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기쁘고 긍정적인 마음 표현은 익숙해졌지만 슬프고 아프고 상처가 될 마음은 드러내지조차 못한다. 그는 내가 순한 사람이라 그런 거라고 예쁘게 포장해 주었지만 나는 이런 세계를 하찮게 깨트리길 갈망한다.


사이렌 소리가 희미해진다. 10년째 같은 집에 살고 있지만 근래 화재경보 오작동이 부쩍 늘었다. 이제는 대피를 요하는 소리에도 무던해졌다. 진짜 불이 나면 어쩌려고. 그에게도 혹시 내가 너무 익숙해서 별다른 느낌이 없는 불감 상태이려나. 내가 얼마나 귀여운 사람인데.

‘당신이 나를 알아간다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질 거예요.’

Siri에게 몇 시인지 묻고서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10CM의 경쾌한 밴드 사운드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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