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쾨쾨한 물비린내가 벽돌로 한 겹 쌓인 노면에 진동한다. 더 이상의 흙내음은 없다는 듯. 어디선가 꺼내진 보도블록 위 지렁이는 말랑하고 윤기 나는 자태로 몸을 웅크리고 있다. 처량한 그 모습이 금방이라도 개미에게 뜯길 모양새다. 줄기를 이탈한 능소화의 꽃봉오리가 촉촉한 흙에 스며들어 있다. 단내를 맡은 개미 무리가 꽃봉오리 정상에 오른다. 시들지 않은 주황빛 사이로 까만 움직임이 분주하다. 나는 한 발자국 뒤로 떨어져 자연의 섭리를 방관한다.
#2
“우산이 없다면 나무를 흔들어 보세요.”
어느 장난꾸러기가 우산을 던지고 놀다가 나뭇가지에 우산을 걸어둔 걸까. 나는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요상한 모양새의 우산을 다양한 각도로 바라보다 지나친다. 우산은 설치 미술이라도 된 양 몇 시간째 진득이 그 자리에 걸려 있다. 아무도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는다.
#3
헐떡이는 숨소리와 걸음에 맞춰 탁탁 찌르는 등산 스틱의 둔탁한 소리가 산속을 메운다. 길을 내어준 바위 위를 자세히 보니 스틱의 날카로운 팁(스틱의 끝부분, 금속으로 되어 있다)에 사정없이 긁혀 하얀 생채기가 나 있다. 산 채로 으깨진 개미도 보인다. 폭신한 지면을 걷던 개미는 운이 좋으면 살아남고, 중력을 거슬러 바위에 오르던 개미는 스틱이나 걸음에 찔려 죽는다. 나는 오늘 몇 마리의 개미를 살해했을까. 개미를 밟지 않기 위해 땅을 보며 산에 오른다. 그들의 상처와 죽음은 누구의 관심도 얻지 못한다. 그저 가파른 숨을 어떤 호흡법으로 진정시켜야 할지, 낡은 장비는 뭘 교체하면 좋을지, 잔뜩 찍은 기념비적인 인증샷 중 무엇을 베스트 컷으로 고를지에만 관심 있다.
세상의 모든 장면 속에는 신의 섭리가 내포되어 있는 걸까. 나는 어떤 영화 속 장면을 보며 감독의 주는 메시지에 감명받듯, 나를 스치는 수많은 장면 속에서 삶의 씁쓸한 명암을 바라본다. 우울이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