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딩 Mar 11. 2024

한여름의 선량한 주민

천장에 초연한 선량함이란

위이이이이잉 쾅쾅, 천장이 울렸다.

 

드르르륵 탁탁, 드릴 소리가 나의 모닝콜을 대신한다. 모처럼 남편과 맞이한 재택 아침에, 38도가 찍는 펄펄 끓은 아침을 드릴 소리와 함께 맞이한다. 20층짜리 아파트에서, 모든 열이 다이렉트로 꽂히는 20층이 우리의 홈 스윗 홈이다. 잘때 전쟁이 나도 모를 우리 남편은, 쌕쌕 코를 골며 잘만 잔다. 아침 8시부터 타의로 떠진 나의 눈꺼풀은 잠을 달라 잠을 달라, 투정하고, 투정에 지친 나의 눈알은 원망의 눈초리를 천장으로 올려버린다. 저기요, 잠좀 자자구요.

 

나도 안다. 나는 화내면 안된다는걸. 화내는게 이상하다는걸.

어제 저녁, 퇴근한 남편과 맥주 한잔을 기울이고 집에 들어오는 길에, 엘리베이터에 붙은 옥상 배수 공사 안내문을 봤다.

아이고, 또 시끄러워지겠네… 투덜거리는 남편에 내가 답한다. 쉿, 우리가 꼭대기 층이잖어. 공짜로 아파트에서 장마 전에 옥상 배수 공사 해주면 제일 득보는건 우리야, 조용히 감사합니다, 해야하는 거야. 오 그래그래, 끄덕이는 남편과 함께 속으로 외쳤다, 우리돈이 아님에, 우리가 제일 수혜자기에, 그렇기에 감사합니다, 또 감사합니다.

 

9시 되도록 쌕쌕거리며 자는 남편을 두고-정확히는 드릴 소리에 38도 아침 열과 함께 뻗칠 것 같은 화의 징조를 느끼고-노트북을 싸들고 카페로 피신했다. 음~ 드르륵 탁탁 대신에 울리는 감미로운 선율과 커피의 향기~…. 띠링, 문자가 울린다.

내용을 보자하니… 이틀 뒤 내가 두달을 갈아넣은 프로젝트 파이널 미팅이 잡혔고, 외국 회사인지라 줌으로 진행하겠다는 문자였고.. 나는 외쳤다, 할렐루야 감사합니다……어어, 근데 말이야, 나의 천장에서 울리는 드릴 소리가 이틀 뒤에도 나온다면?

 

바이어: 하이, 미세스 정, 투데이쓰 미팅 이즈…

나: 달달달달 드르르르륵 쾅쾅쾅쾅….

 

안돼안돼, 무서운 생각에 치를 떨며 관리실에 전화를 걸었다. 목적은 단순했다. 공사 일정을 알려달라고. 공사가 이틀뒤까지 이어진다면, 스터디룸을 구할테고, 아니라면 집에서 할테니까. 단순히 질문이 목적이었다, 정말 그랬다. 내 전화를 받은 관리인은 업체 소관이라 모른다고 답했고, 그렇다면 어느정도 지속되냐 물었더니 일주일 정도 걸릴 거라 답했고…

 

화가 뻗쳤다. 타겟이 잘못 조준된 화가 뻗쳤다. 주민 좋으라고 하는 공사에 순수 질문으로 포장한 은근한 민원 전화를 넣는 내 자신이 들킨 것 같은 화가, 위에서 땡볕 옥상에서 누가 공사를 하건말건 스터디룸을 따로 구해야하는 귀찮음을 느낀 내 자신에서 치지미는 화가, 관리인을 향했고, 감사합니다, 로 마무리해야했을 전화를 그저 네, 하고 끊어버렸다.

 

내 사정을 들은 남편은, 아이고 그럼 공사 중단해달라고 해야지, 당신도 주민인데 주민들한테 민폐인거잖아! 내가 내일 공사하시는 분들한테 중단할 수 있는지 물어볼게, 라고 외쳤고, 아이고 자기야, 그러면 어떡해, 이 더위에서 그것도 옥상에서 이렇게 고생을 하시는데 그럼 안되지~ 내일 시원한 물이라도 떠 드릴까봐~ 라고 나는 외쳤다.

 

그리고…옆집네 물어보니까 이틀 내에 공사 마무리 되는 것 같더라고…

 

그래그래, 이것봐, 나는 이렇게 힘든 사람들도 생각하는 선량한 주민이야. 감사하게도 나의 천장을 수리해주는 그분들에게 나의 선의를 베푸는 것을 감히 선의라고 해도 되는걸까? 이정도는 선한 시민의 당연한 도리가 아닐까?.....

 

아아, 얼굴이 화끈인다, 얼굴에 불이 날 것만 같다. 공사가 미팅 전에 끝난다기에, 안락하게 집에서 바이어를 만날 수 있기에 나온 선의에, 관리인과의 통화에서 느껴졌던 못난 화는 흔적도 없어진 듯 나는 선량한 주민을 코스프레한다… 남편 보란 듯 공사해주신 분들을 위해 얼음 음료수를 준비하는 내 자신의 모습에 그래그래, 나는 선량한 시민이지, 다시금 다독인다….

 

끝난 줄 알았던 공사… 그리고 온전한 선량한 시민이 된 줄 알았던...그랬다고 믿고 싶었던 나

베일 벗겨진 나의 온전한 선량함은 공사 끝난 지금에 묶여버린 한시적 프리덤이 아닐까요?

 

그렇다면…조심하라 미래의 나여, 한시적 프리덤이 깨지기 단 십초전이다….

달달달달….천장에 공사 재개의 사운드가 스리슬쩍 시작되었고…


 

위이이이이잉 쾅쾅, 천장이 울렸다.

 

매거진의 이전글 토모다치들의 제주살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