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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원 Dec 07. 2024

일본 이자카야에서 오타니를 말했더니 생긴 일

삿포로의 추억


최근 남편과 짧게 일본 삿포로에 다녀왔다. 둘 다 도통 바빠 겨울 휴가를 못 떠났는데 마침 3박 4일의 시간이 생겼고 지체 없이 비행기 티켓부터 샀다. 먼 나라는 부담스럽고, 남편은 늘 겨울의 삿포로를 보고 싶어 했기에 고민할 거리가 없었다. 겨울이 성수기라 저가 항공편도 비쌌지만 괜찮은 시간대가 남아있는 걸로 만족했다. 그리고 후딱 숙소를 찾아 괜찮은 곳에 결제까지 마치니 어느새 떠날 준비는 마쳤다.

여행 1~2일 차는 삿포로 시내의 가장 번화가인 스스키노역에 묵었다. 전철역과 바로 연결돼 있는 호텔이었는데 이보다 완벽한 위치는 없을 정도로 만족했다. 다만 첫째 날 새벽 4시에 일어나 비행기를 탔고 하루종일 걸어 다니느라 너무 피곤했는지 밤 10시에 씻고 자버렸다. 하필 이날 두통이 겹쳐 진통제를 여섯 알 먹은 탓에 세상모른 채 잤다. 다행히 둘째 날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그 이자카야를 간 건 둘째 날 밤이었다. 1차론 징기스칸이라는 삿포로 양고기 구이를 먹었고, 2차론 원래 다른 곳을 가려했다. 한국인들에게 입소문이 나있는 곳이 몇 군데 있었다. 사장님이 친절하고, 자리가 편하고, 음식이 맛있고, 과하게 비싸지 않은 곳들. 신뢰도 높은 구글 리뷰에서 4.3 이상을 받은 가게들. 그중 두 군데를 먼저 찾아가 봤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니 어딘가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둘 다 문 앞에서 주저했고, "우리 다른 데 갈까?"라는 말을 꺼내기 무섭게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좀 더 걷다가 남편이 구글 지도를 보여주며 여기에 가보자고 했다. 구글 리뷰라곤 딱 9개. 그마저 한국인이 쓴 건 두어 개 밖에 없었다. 일단 고. 마침 근처라 바로 가봤다.

찾아가 보니 한 건물 4층에 있는 작은 가게였다. 건물도 너무 조용하고 4층은 더 고요해서 잘못 온 줄 알았는데 다행히 간판이 있었다. 문 앞에서 내부를 살펴보니 바 말고 테이블은 딱 2개뿐. 이미 바에는 손님 2명 일행이 사장님과 너무 즐겁게 얘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도 되는 분위기인가 3초 정도 고민했지만, 날이 추워 일단 들어갔다.


테이블은 이렇게 두 개가 전부.


우리는 안쪽 테이블에 앉았다. 양고기를 일부러 적게 먹고 왔기에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다양하게 시켰다. 둘 다 일본어는 한 마디도 못하지만 파파고가 있으니 두려울 건 없다. 나는 삿포로 생맥주, 남편은 이름 모를 사케도 주문했다.

우리는 우리대로, 일본인 손님은 그들대로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손님들은 사장님과 무척 친해 보였는데, 일본어는 모르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이게 정말 '로컬' 식당이구나 만족해하며 남편과 두런두런 얘기를 했다.

파파고 덕에 수월했던 여행. 그런데 메뉴의 '이모버터구이'는 아직도 뭔 지 모르겠다.


그러다 30분쯤 지났을 때 남편이 화장실을 가려 나갔고, 잠깐 나 혼자 앉아있었다. 그때 그 일본인 일행이 일본어로 말을 걸어왔다. 알아듣지 못해 난처하게 웃자 만국의 필수템 구글 번역기를 꺼내 내게 여행 중인지 물었다. 나는 파파고 번역기를 이용해 답을 했고 그렇게 몇 가지 대화가 오갔다. 한국인이냐, 언제 왔냐, 어디에 묵냐 등. 50대 정도로 보이는 두 손님 앞엔 술잔이 여러 개 놓여있었고 기분 좋게 취한 모습이 보기 좋아 나도 맥주를 한 잔 더 주문했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남편까지 합세해 넷이 함께 얘기하기 시작했다. 부엌에 있는 사장님까지 중간중간 말을 섞으며 정확히는 다섯의 시간이 시작됐다. 번역기를 써 바로바로 말이 오가진 못했지만, 문제는 없었다.

간단한 여행 토크에 이어 여자 손님은 배용준을 좋아했다며 커다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남자 손님은 손흥민 얘기를 꺼냈다. 나도 화답해야 할 것 같아 머릿속으로 유명한 일본인을 서둘러 생각해 봤는데 결국 가장 먼저 생각난 건 오타니였다. 오타니 쇼헤이는 슈퍼스타다, 한국에서도 워낙 유명하다 같은 말을 파파고에 담았다. 우연인지 인연인지 남편이 이날 쓴 모자가 올해 초 MLB 서울시리즈 직관을 보러 갔을 때 샀던 거라 그때 오타니를 실제로 본 이야기까지 덧붙일 수 있었다.

오타니가 시작한 이 대화의 주제는 결국 야구로 흘러갔다. 그리고 대화는 더 즐거워졌다. 손님들은 우리에게 한국의 야구팀을 물었고 마침 또 남편은 이날 LG트윈스 빠더너스 콜라보 재킷을 입고 이자카야에 갔더랬다. 그렇게 LG 트윈스를 설명했고, 그들은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들은 일본에 진출했던 이대호 선수 얘기를 먼저 꺼냈고, 사장님은 미국에 진출한 김하성이 잘한다며 대화에 살을 붙여갔다.

남편이 이날 입었던 LG트윈스x빠더너스 자켓. 9월에 시킨 옷이 11월에 배송와 야구장에 입고 가질 못해 여행에 챙겨왔다.


그렇게 한참을 먹고 마시며 야구 얘기를 했다. 간단한 문장들을 휴대폰으로 번역해 가며 나눈 대화였지만 재밌었고 따뜻했다. 그들이 자리를 뜰 때 아쉬운 마음이 들 정도로 유쾌한 시간이었다. 대화를 하다 그날이 우리의 결혼기념일이라는 것까지 얘기했고, 그 손님들은 크게 박수를 쳐줬고 사장님은 사케 한 병을 선물로 내어줬다.

우리가 자리를 떠날 때 사장님은 명함을 줬고, 다음에 또 놀라오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에 삿포로에 가게 되면 정말 또 가보려 한다.


낯선 이와 말하는 걸 즐기지 않는 내가 그 작은 타지의 술집에서의 대화가 무척 좋았다. 어떤 야구선수들은 그 나라의 상징이 되고 그 시대를 읽는 책갈피가 된다. 말도 통하지 않는 네 사람이 단 하나의 공통적 취미로 한참 얘기를 나눌 수 있었던 이유다. 여행 내내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었고 좋은 구경을 많이 했지만, 이 날 밤이 가장 오래 기억날 것 같다.

 

사장님이 선물로 내어준 사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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