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나는 역적이었더라도
다음 타석이 있을 테니
코트를 입어볼까 하다 오늘도 롱패딩을 꺼낸다. 한 달 내내 여러 브랜드를 전전하며 간신히 찾아낸 마음에 쏙 드는 레더재킷은 2주를 채 못 입었다. 곧 영하권의 날씨란다.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면서도 가장 생각이 많아지는 시절이다.
며칠 전 퇴근하고 집에 와서 레드와인에 하이볼까지 마셨다가 탈이 났다. 많은 양이 아니었는데 빨리 마신 게 문제였다. 올해 이런 실수를 몇 번 했다. 다음날 숙취로 머리를 부여잡을 때면 전날의 내가 한심해 한숨이 나왔다. 술은 즐거울 때 마시는 거라는 친구의 말이 두통과 함께 맴돌았다.
얼룩진 날들의 공통점은 그날의 하루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단 거였다. 빠르게 기분을 환기시킬 방법을 찾다가 와인잔을 꺼낸다. 이제 야구 시즌도 끝나버려 매일 3시간 진득하게 집중할 거리도 사라졌다. 볼만한 걸 찾아 유튜브에 들어간다. 타구단 채널까지 기웃거린다.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각종 영상을 뒤적이다 반가운 얼굴을 본다. LG 김현수 선수가 김태균 해설위원 유튜브에 출연했다.
인스타도 도통 안 하는 김현수의 인터뷰를 볼 수 있다니. 비시즌의 얼마 없는 즐거움은 이런 건가. 영상에서 그는 시즌 중 힘들었던 점, 디펜딩 챔피언으로서의 부담, 타격폼 변화에 따른 아쉬움까지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리고 이 질문이 나왔다. 순위 다툼을 치열하게 할 때 KIA에 연달아 패했는데(3승 13패다) 어땠는지. 그중 여러 경기는 직관도 했던 터라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났다. 선수는 이렇게 답했다.
"정말 힘들었어요. 야구는 그날그날 역적이 생기잖아요. 제가 또 많이 했고."
역적이라는 말을 선수 입으로 들으니 어떤 부담이나 책임감이 간접적으로나마 느껴졌다. 김현수다운 꾸밈없고 직설적인 대답이라 더 그렇다. 시즌 초반 주장직까지 얹어진 그에겐 '타격 부진' 같은 말이 내내 따라다녔다. 성실하고 꾸준해 십수 년 동안 스스로를 증명해내며 살아온 김현수 선수도 매 타석 긴장할 수밖에 없나 보다. 그도 그럴 게 아무리 굵직한 대기록을 써왔대도 지금 서 있는 발끝은 뒤가 아닌 앞을 향할 수밖에 없다.
내 하루는 어땠었나. 진절머리 나게 마음에 안 드는 그날들을 만든 건 때론 타인이기도 했지만 나 자신이기도 했다. 이렇게 할 걸, 그렇게 하지 말 걸, 다른 방식으로 해 볼 걸 후회한 기억들을 돌아본다. 내 실수로 여러 사람이 번거로워졌던 괴로운 하루도 있었다.
내일도 내년에도 앞으로도 일을 할 거라면 답은 정해져 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좀 더 나은 다음을 준비하는 수밖에. 아무리 뛰어난 타자도 열 번의 타석 중 일곱 번은 빈 손으로 돌아간다. 어제의 영웅이 오늘의 역적이 되기도 하지만,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불확실과 불완전 속에서도 나를 잃지 않으면 된다. 잊기 쉽지만 간단한 이 말이 내게 필요했던 것 같다. 와인과 하이볼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