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 선호, 사회적 선호

달리기를 하며

by Neonsky

보통의 사람들은 아주 개인적인 존재로서, 자신만의 취향을 가진다고 생각하지만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자기가 살아가는 사회와 그 사회를 이루는 사람들의 영향에 따라 살아간다.


따라서 스스로가 개인적인 목표를 위해 희망을 가진 채 노력한다 하더라도, 결국 사회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목표일지도 모른다는, 조금은 안타까운 현실을 직면할 수밖에 없다.


물론 개인은 스스로 독립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누군가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인 성취, 개인적인 취향 조차도 독립적이지 못한다는 사실은 자칫 ‘나만을 위한 노력을 한다’는 원동력을 잃어버릴지도 모르겠다.



가령 내 경우는 10KM 내외의 가벼운 달리기를 선호해 1주일에 3,4 회 정도 강가를 따라 달린다. 이렇게만 보면 달리기 자체가 나만을 위한 목적, 행위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아닐 수도 있다.


달리기가 취미로서 허용되는 호주 퍼스의 환경, 강가나 공원을 따라 달리는 게 일상인 곳에서 달리기를 한다는 것 자체는 그리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아주 건강한 취미를 가졌다고도 인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아주 덥고 먼지가 많아 달리기를 선호하지 않는 나라라면? 물이 지독히도 부족해 흘린 땀을 보충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물을 마실 수 없는 나라라면? 이것도 아니라면 조선시대처럼 달리는 행위 자체가 천하다고 여겨지는 곳이라면?


이렇듯 내가 실제로 달리기를 좋아하고, 아주 희망적이고 진취적인 취미라고 생각할지라도 사회 자체가 달리기를 선호하지 않거나, 무가치한 것으로 판단한다면 개인의 취향 따위는 가뿐히 묵살될 수 있다.


물론 아주 가아끔 등장하는 높은 자주성이나 영웅적 속성을 소유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비개인적인 속성, 즉 사회의 시선이나 환경들을 이겨내고 끝내 자신만의 목적을 달성한다. 그런데 대다수의 경우(물론 나를 포함해서)는 그들 같은 독립성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때문에 시대 사회를 초월한 목표를 달성하거나 자신만의 취향을 유지해나가는 일은 요원하기만 하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호주 퍼스라는 곳이 이런저런 실험을 하기에 좋은 환경이라는 사실이다. 원래의 고향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거나 전혀 새로운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 자신의 의무, 습관, 이해관계의 굴레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객관적으로 자신의 선호가 무엇인지를 비교적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되는데, 사회적 환경이 주는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지속하는 행위가 무엇인지 지속되는 선호가 무엇인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아주 단편적인 예로 지금껏 왜 내 옷장이 검은색 옷이 많았는지, 내가 정말 달리기를 좋아하는지 한국에서는 알지 못했었다. 하지만 덥디 더운 다윈에서도 비질 땀을 흘려가며 꾸준히 달리기를 했었고, 태양빛을 흡수하는 검은색 옷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색 옷을 구매하는 것을 보며 명확한 내 선호를 깨달았다.



한국에서는 그저 서울에서 한창 유행하던 런 클럽을 동경해 달리기를 시작한 게 아닐까,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늘리기 위해 성미에 맞지 않는 이런저런 취미를 하는 건 아닐까 고민했었다. 비로소 호주에 와서 확실한 취향을 깨닫는다.


도망치듯 떠나온 호주였지만 비로소 1년 동안의 목표를 발견한다. 특별할 것 없는 수준의 고민을 통해 조금 더 세련된 솜씨로 삶을 구분 짓거나, 시대가 강요하는 행복이 아닌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해야지.


내일은 룸메 로렌조를 채근해 나란히 스완 리버를 달려봐야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식료품을 사들고 오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