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비, 취향, 돈
콜스에서 한가득 장을 봐 오는 길. 이만하면 되겠다 싶어서 비닐봉지 2장에 식료품을 나눠 들고 건물을 나섰지만, 채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손잡이가 떨어져 나갔다. 이곳 호주에서 장을 볼 때마다 종종 겪는 일이지만 짜증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육성으로 터져 나오는 욕지거리를 억누르고 묵묵히 집으로 향했다.
플라스틱 소비를 줄이려는 의도인가. 애초에 불량품을 만들어 사용을 꺼리게 만드는 수작 말이다. 왜 이딴 봉지에 불량품이 존재하는지 당최 이해가 가질 않았다. 짧은 순간에 별별 생각들이 스쳤다.
아직 집까지는 15분가량을 걸어가야 하는데 한쪽 빗겨 맨 크로스백과 그나마 양손에 나눠 쥔 싸구려 봉투의 무게가 돌연 늘어난 것만 같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블루 캣을 타고 갈까, 아니면 터진 봉투를 손으로 틀어막고 걸어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어쩔 수 없이 몇 번을 쉬어가며 집에 도착했다. 고생 고생하면서 도착한 셰어하우스이지만 짊어지고 온 식료품의 무게만큼의 고민이 뒤따른다.
식재료가 떨어지면 다시 또 이 짓거리를 반복해야 한다는 번거로움과, 이번에는 며칠이나 먹을 수 있을지, 저번처럼 채소들이 물러서 사용도 못 해보고 버리지는 않을는지 하는 등의 고민, 이번 달 생활비가 얼마나 들었는지 하는 사소한 고민이 줄줄이 이어졌다.
따지고 보니 결국 돈에 대한 고민이 아닌가 싶다.
호주에 와서 살면 살수록 돈에 대한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낀다. 아빠가 학비나 용돈의 대부분을 충당해주었던 대학 때에는 그리 와 닿지 않았던 생활비가 이곳 호주에서 유독 크게 느껴진다.
2주에 한 번씩 내는 방값과 세 끼를 챙겨 먹을 식재료 값, 가끔 하는 외식과 커피 정도 사 마실 수 있는 용돈, 항상 모자란 데이터 탓에 자주 갱신하는 핸드폰 요금, 이 와중에 포기할 수 없는 미용과 의류비용 등등이 오롯이 내 몫으로 떠맡겨진 지금에야 돈의 중요성을 실감한다.
물론 한국에서 취업한 뒤에는 스스로 생활비를 충당했다지만 꼬박꼬박 들어오던 월급을 쪼개 사는 생활에서는 그리 체감이 크지 않았다. 없으면 없는 대로 집에서 먹거나 쇼핑을 덜 하고, 아니면 친구들에게 잠시 신세를 지며 그럭저럭 넘길 수 있었다.
숨 쉬고 먹고 마시는 모든 요소들을 스스로 부담해야 하는 이곳 호주의 삶은 한국에서 취준생이었던 때보다 훨씬 각박하게 느껴진다. 캐주얼 잡일 때는 조금이라도 일을 소홀히 대한다면 근무시간을 줄이지는 않을지, 한가해지면 한가하다고 조기 퇴근시키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불안의 연속이었다. 시프트가 줄면 바로 생활비로 타격이 이어질 테니까. 퍼스로 넘어온 뒤에는 풀타임 워커로 근무하며 매주 고정적인 돈을 받는다지만 그렇다고 사정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이렇게 하나하나 부담하다 보니, 역시 한국에 계신 아빠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다. ‘그거 얼마나 차이 난다고’하며 시골 밭에서 각종 채소를 뽑아오거나 시골 5일장에서 장을 봐오시던 아빠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던 내 철없음이 떠올라 괜스레 목이 매여온다. 본인의 생활비 외에도 철없는 아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생활비를 아껴가며 허리띠를 졸라 매야만 했던 아빠의 마음이 이제야 조금 이해가 갔다.
또 돈이 없으면 취향과 기호 따위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좋아하는 커피를 포기하고, 낡고 헤져가는 속옷을 선뜻 구매하지 못하거나 책을 읽다 흥미가 동하면 충동적으로 관련 서적들을 구매하던 습관 대신 한 권 한 권 신중하게 구매하게 되는, 오로지 정해진 생활비 내에서만 생활하는 삶은 참으로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특별한 이벤트를 계획하거나, 갑작스러운 약속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결국 생활비 외의 지출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미 이번 달 저축과 생활비, 약간의 용돈으로 지출 내역을 꽉 채워버린 시점에서는 사소한 일 하나에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고 그저 평이하게 삶이 흘러가길 바랄 수밖에 없다.
룸메 로렌조가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것처럼, 장 보는 것을 깜빡하거나 생활비가 부족해 먹을 게 없으면 그냥 도미노 피자나 시켜 먹는, 그런 싱글남의 초라하고 지루한 일상이 되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비록 돈은 물질적 속성을 띄고 있지만 내 '정서적' 건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콜스 장바구니 따위를 보며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