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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희 Feb 20. 2022

길 위에서 그들을 만나다 2

 거리의 악사

 가만히 바라만 봐도 즐거웠던 곳은 대부호의 저택을 개조했다는 피카소 박물관이다. 소매치기를 주의하라는 람블라스 거리 역시 나를 재미있게 했다. TV에서 보았던 가위손을 비롯하여 다양한 퍼포먼스가 그곳에 있었다. 거리 한 편에 있던 보케리아 시장도 여간 흥미로운 것이 아니다. 과일과 해산물을 팔고 있었는데 우리 재래시장 같은 또 다른 곳에서는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수제 소시지와 채소가 풍부해 구경하는 재미에 빠져 발걸음을 떼기 어려웠다. 우리는 그곳에서 약간의 과일을 샀고 스페인식 볶음밥인 빠예야를 먹으니 갑자기 누군가가 그리워 오래전처럼 엽서가 쓰고 싶었다.


 지하철과 거리거리에서 만났던 악사들은 또 얼마나 내 발걸음을 잡았던가. 그들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어김없이 달콤한 눈인사를 건네 그냥 올 수 없게 만든다. 말로만 듣던 장느가 다른 버스킹을 저쯤 가면 만나고 저쯤 가면 만나니 거리 구경이 얼마나 신났는지. 나를 잠시 설레게 하는 그들의 연주는 1유로를 결코 아깝지 않게 한다. 잠깐 이들의 문화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트벨 항구

 무엇보다 나를 경이롭게 한 것은 탁 트인 지중해가 배경인 포트벨 항구다. 9월인데도 날씨는 제법 쌀쌀했다. 그러니 머플러를 둘러야 할 밖에. 지중해 야경과 멀리 보이는 수중 조각상. 선착장에 매여 있는 셀 수없이 많은 고급 요트들. 날아갈 것 마냥 길게 나풀대는 시폰 머플러. 속절없이 그만 현실을 잊고 만다. 그렇다 한들 탓하지는 말자. 어느 누구인들 이 순간 냉정할 수 있을까. 


 물결무늬 선착장 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고 바다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환히 보이는 새파란 바닷속은 성인 남자 팔뚝보다 더 큰 물고기들로 가득하다. 와글와글 시끄럽게 소란 떨 듯 떼를 지어 헤엄치는 것이 자유롭다. 어쩌면 튀어 오를 것 같아 무섭기도 하지만 내려다보고 있으면 나까지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낀다. 시퍼렇다고 해야 할 ‘이’ 지중해를 그래서 결코 잊을 수 없겠다. 

 

  아쉬움

아기자기한 고급 장식품 골목이며 만지작거리다 만 가면무도회 속 멋진 가면들도 상쾌한 인상이 아니었던 가면 가게 여주인도 또한 잊지 못할 기억이 되었다. 


   혼자 다니며 들렸던 소품 가게들과 오래 서서 구경에만 몰두해야했던 멋진 가면들, 그냥 두고 온 그것들이 이제 와 못내 슬프다. 그런 까닭인지 상쾌한 인상이 아니었던 가면 가게 여주인도 또한 잊지 못할 애틋한 기억이 되었다. 가끔 두고 온 아쉬움을 딸에게 전하면 그것도 못 샀느냐고 엄마 바보! 한다. 이런, 에미 마음도 모르는 너, 바보! 

 

 아랍인

 반드시 벼룩시장은 가고 말 거야, 벼르고 별렀는데 마침 벼룩시장이 서는 날이란다. 지하철을 타고 자바라가 이어져 재미있게 구불거리는 버스를 타고 상상만 하던 유럽의 벼룩시장을 갔다. 막상 보니 우리의 작은 남대문 시장 같기도 하고 조금 넓은 황학동 같기도 하다. 퀴퀴한 냄새를 풍기며 팔 하나가 없는 마루인형부터 오래된 가구와 액자가 깨진 미술품까지 온갖 잡동사니를 거르지도 않고 쏟아놓은 채 팔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조악하고 볼품없는 의류와 공산품이 제법 손님을 맞는다.  


 그러나 내가 관심을 가지고 훑고 있는 것은 다소 복고적이고 앤틱 한 소품이다. 그런데 벼룩시장이라고 만만하게 봤더니 마음에 들면 가격이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다. 은장식의 타이핀과 긴 목걸이는 몇 걸음을 다시 했어도 내 손에 들어오지는 못했다. 그러다 두툼한 유리가 깨진 갈색 가죽 줄을 지닌 손목시계가 눈에 띄는 것이 아닌가. 가격을 물어보니 30유로, 환율로 약 6만 원 정도다.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으려나. 하지만 정말 가지고 싶었다.


 몇 바퀴를 돌다 흥정하고 또 돌고 흥정하고. 수염이 덥수룩한 아랍인은 그럴 때마다 조금씩 낮추기는 했지만 그래도 결코 대단치 않은 가격이다. 그럴 때마다 딸아이의 통역이 길어진다. 마침내 10유로! 그것도 옆에 다소곳하게 있는 여자용 손목시계를 얹어서였다. 그러고 보니 비슷한 분위기의 두 시계가 제법 마음에 든다. 

 아이에게 물어봤다. 무슨 말을 했니? 


“‘아주머니의 남편을 위해 그 시계를 반드시 사고 싶은데 돌아갈 여비를 제하면 10유로 이상은 전혀 어렵답니다. 시계를 사지 못하면 시장이 파할 때까지 아마 이곳에 계속 서 있을지도 몰라요, 더구나 아주머니는 자신도 시계가 없다고 하네요. 그러니 10유로에 그냥 해드리면 안 될까요?’ 이랬지롱!”  


  그녀

 숙소는 늦은 시간까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어서 불편하지는 않았다. 비수기인 까닭에 손님은 우리와 두 명의 여학생과 또 한 여자뿐이어서 방은 많이 비어있는 편이다. 마침 조금 일찍 들어온 저녁, 피곤한 나를 제외하고 아이들은 플라멩코 공연을 관람하고 돌아왔다. 세 시간 넘게 식사와 더불어 무희들과 함께 하는 플라멩코 댄스를 경험하고 온 아이들은 흥분이 가시지 않아 시끌벅적 어쩔 줄 몰라한다. 


 아이들이 없는 동안 혼자 여행 중인 여자가 우리 방을 찾아왔다. 챙겨나간 짐을 몽땅 잃어 숙소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흔히 말하는 전문직의 골드 미스였는데 무작정 퇴직을 하고 일 년 동안 세계 여행 중이라고 한다. 아, 내겐 꿈처럼 달콤한 이야기이다. 런던에서 돌아와 이제 다음 목적지는 파리이었단다. 그러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만 짐을 몽땅 잃은 게다. 


 아이들이 돌아올 때까지 시간 가는 것을 잊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뜻밖에 지루한 줄 몰랐다. 연락처를 주고받으며 내년 설날에 맞춰 돌아올 것이라 한다. 그녀는 곧 주한 대사관이 있는 마드리드로 가기 위해 밤기차를 타야 해 준비 중이다. 컴컴한 골목까지 배웅을 하는 것으로밖에 도울 수 없어 안타까웠다. 원하는 여행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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