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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희 Feb 20. 2022

길 위에서 그들을 만나다 3

 그리고 그녀

 송이를 하루 먼저 보내고 오늘로 사흘째다. 그러고 보니 주인 남자는 이곳에서 별로 하는 일이 없다. 숙박객을 픽업하는 것 외에 아주머니가 식사를 준비하고 나면 가끔 설거지를 거드는 것이 가장 큰일 인 듯하다. 시간이 나면 고양이를 끼고 소파에 길게 누워 오수를 즐기기도 한다. 그러다 저녁이 되면 자기만의 시간이라며 새벽에 돌아올 것이라 하고 홀연히, 당당하게 외출을 한다.  


 이들 부부를 보면 30여 년 전에 본 ‘캣’이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시몬느 시뇨레와 쟝 가방이 노부부로 출연했는데 쟝 가방은 고양이를 안고 늘 흔들의자에 앉아 있다. 둘은 언제나 따로따로 화가 난 표정으로 말이 없다. 영화의 엔딩이 상상될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이들이 그들만큼 결코 섬뜩할만한 쓸쓸함을 지니지는 않았다. 그러나 있는지 없는지 설혹 배려라 하더라도 서로 알려하지 않는 그들을 보고 있으려면 비록 단편적인 표정이라고는 하지만 보는 나로 하여 잠시 허허롭게 하는 것이 있다. 이곳까지 와 평생 함께 해야 하는 부부의 모습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첫날 아주머니는 처음 보는 내게 남편에 대한 소원함을 편히 말하는 것에 조금 불편했던 것이 사실이다. 아픈 데는 자꾸 손이 가는 것 마냥 그러고도 그녀는 은연중에 남편의 서운함을 비치곤 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가까운 사람에게 결코 할 수 없는 사연도 열차 옆자리에 앉은 낯선 사람에게 남의 말하듯 쏟아낼 수 있는 것이 가슴에 담아둔 이야기이다. 그렇기는 해도 그녀 그런 모습이 그다지 흉하지 만은 않았던 것은 아내로서 바라는 또 다른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서였다. 어쩌면 남자의 첫인상이 달갑지 않았던 것은 몸에 밴 한량 모습을 낯선 여자에게 보였던 까닭은 아닌지 모르겠다.    

      

   새 신부

 툴루즈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스페인계 프랑스 숙녀를 만났다. 터미널에서부터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기는 했다. 얼굴이 조막만 한 키도 그리 크지 않은 금발의 날씬한 아가씨이다. 스물서너 살쯤 되어 보이려나? 딸아이와 나는 스페인에서 프랑스 국경까지 이어진다는 지중해와 언덕 위 그림 같이 예쁜 집에 넋을 읽고 감탄하고 있을 때다.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 것은. 


 딸아이가 무어라 무어라 대꾸하자 활짝 웃으며 또 무어라 무어라 화답한다. 그때부터 그녀와 나 사이를 왔다 갔다 아이는 뜻을 전해주며 서로 저들만의 이야기에 흥미를 가지는 눈치다. 그러다 급기야 내가 그만 불편해지고 말았다. 조금씩 알 수 없는 말이 기실 귀찮아지기도 했고 창밖 풍경까지 자꾸 놓치고 말아 그냥 너희끼리 이야기하라 하며 자리를 바꿔 앉았다. 툴루즈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다. 잠깐 휴게소에 내려 차도 마시고 함께 사진도 찍고 준비해온 간식도 나눠주며 긴 시간을 보냈다. 


 한국은 가본 적이 없고, 엄마와 함께 하는 여행이 부럽다, 아빠는 스페인인이며 엄마는 프랑스인인데 엄마가 강해 아빠가 툴루즈에 산다는 둥, 스물다섯인데 곧 영국인과 결혼을 해서 겸사겸사 부모님께 알리러 그곳에 가는 중이라는 이야기. 플라멩코 춤은 어릴 적부터 학교에서 배워 대부분 스페인 사람들이 그 춤을 출 줄 안다며 손가락 동작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도 한다. 가볍게 사과를 쥐고 돌리듯이 하란다.


찍은 사진은 서로 메일로 보내기로 하고 터미널에 내려서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오부아’ 하며 쿨~하게 돌아서 가버리고 만다. 


 조금 전 나는 이것도 인연이라 식사 대접 한번 할까 했더니만 “엄마, 여기 프랑스 거든!” 하기는 내가 생각해도 이건 정 많은 대한민국 아줌마다운 다소 유치한 발상이기는 하다.     


  사람들

 스페인 국경을 넘어 툴루즈까지 오는 동안 뾰족한 향나무가 가로수처럼 계속 이어지고 있다. 잘 깎아 놓은 연필심 같다. 수십 미터 높이의 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쑥 뽑아 손에 쥐고 길게 낙서라도 하고 싶다. 그러고 보니 이곳 또 어디서나 아무데서나 어김없이 예술적 그래 피트가 내 시선을 잡는다. 파리에서 본 첫 느낌과는 다르게, 아니 어쩌면 길들여진 시각 탓인지 도안이 재치 있고 재미있다.


 스프레이로 저런 멋진 그림을 드로잉 할 수 있다니. 남의 차건 남의 벽이건 남의 가게 문이건 아무런 상관이 없다. 밤에 살짝 와서 후다닥 치지직 그려놓고 가버린단다. 아침 출근길 주인은 얼마나 황당할까. 그래도 그들은 웃지 않을까. 그런 경험을 나도 잠깐 바라본다.


 보내든 떠나든 이별은 늘 애잔하고 안타깝다. 우리보다 먼저 떠나는 송이와 따로따로 지하철을 타야 할 때 잡은 아이 손을 못 놓아 어쩔 줄 몰랐고, 깜깜한 골목길에서 뒤를 돌아보며 양손을 흔들던 그녀가 잔상처럼 남아 안부를 내내 걱정해야 했다. 꼭 다시 한번 들리라던, 들리겠다던 또 다른 그녀와의 약속에도 이별이 주는 애수와 쓸쓸함이 있다. 벼룩시장에서 만난 마음 따뜻했던 아랍인. 이 모든 것은 그곳의 정서와 함께 오랫동안 기억되어 나를 뭉클하게 할 것임을 안다. 그러고 보니 여행에서 귀하게 얻은 것은 풍경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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