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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희 Feb 17. 2022

대상포진을 앓다

      

 벌써 며칠째 인지 모르겠다. 얼마나 아픈지 밤잠을 못 이루는 것은 물론이고 몸살처럼 아픈 데다 속까지 울렁여 어떻게든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만 같다. 그런데도 너무 아파 이리 픽, 저리 픽 아무 데나 쓰러져 누워버리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다이다. 옆에서는 도무지 이해를 못 해 병원에 가봐야 되지 않느냐는 충고가 또한 전부다. 물론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다. 얼마나 아픈지 그들은 모르기 때문이다. 설명할 수 없이 애매하게 아픈 고통을 정말 무어라 통쾌하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지독한 대상포진을 앓은 후부터 인듯한데 단순포진 바이러스가 어딘가 잠복해 있다 어수룩한 내 기운을 틈타 또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그렇게 가끔 앓기 시작한 지 벌써 십수 년째다. 어느 날 그저 몸살처럼 오더니 궂은 날씨만 되면 성해 대는 신경통처럼 눌러앉아서 심술이 나면 가만히 있는 나를 괴롭히곤 한다. 그러고 나면 손톱만 한 물집들이 나를 완전히 쓰러뜨리고 만다. 밤송이를 깔고 앉은 것처럼 왼쪽 허벅지와 허리, 엉덩이까지 때론 쓸리듯 오는 통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까칠까칠한 금속으로 찌익 긁는 것 같은 기분 나쁜 느낌이기도 하다. 물집이 있는 한쪽 그것도 반대쪽만 이리 아프니 이 녀석도 참 유난스럽다. 그나마 기세가 억척스러운 녀석이 아니어선지 미리 앓은 대상포진만큼 끔찍할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대상포진이 뭐냐고 묻던 이가 언젠가 핼쑥해서 나타났다. 두어 달만의 외출이라며 반죽음 상태로 보냈다고 한다. 대상포진을 앓은 것이다. 얼마나 아팠을까, 난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느달없이 강적을 만났다. 내가 앓고 있는 것만큼의 통증에 여러 병원을 섭렵했을 정도니 뚜렷한 병명도 모르고 이유 없이 앓아야 하는 것에 놀랐던 모양이다. 그녀는 두려울 정도가 아니라 공포감을 줄 만큼 극심했다는데 흔적을 보니 나까지 놀라웠다. 대상포진이라는 병명을 알았을 때 그제 서야 나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비로소 둘은 마치 무용담을 말하듯 그랬니? 그랬구나! 그랬겠다, 라며 힘들었던 고지에서 동지를 만난 듯 힘을 얻고 있었다. 상처 없는 사람과는 친구도 하지 말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대상포진을 앓아보지 않은 사람과는 알은척도 하지 말자는 듯 우리는 그렇게 그동안의 고통을 정답게 나눴다. 서로를 위로하며 서로에게 공감하며 선험자로서 나는 그녀에게 지나고 나니 별 것 아니라는 안심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도 조금은 따뜻하게 보였을 게다. 눈물겨운 동병상련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앓았던 20세기 말에는 아직까지 대상포진에 대한 상식이 그다지 대중적이지는 않았다. 어릴 적 수두 바이러스가 체내 어딘가 잠복해 있다가 그것을 이기지 못할 만큼 몸과 마음이 허약해지면 신경 선을 따라 비집고 나와 띠처럼 둘러지면서 물집이 생기는 질병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간혹 얼굴에 발병이 되는 경우는 구안와사가 오고 눈과 귀에 올 경우는 실명까지 하게 되는 무서운 병이라고 한다. 


 내 경우에는 귀 안에서부터 시작이었는데 고통에 못 이겨 간 동네 이비인후과에서 당장 입원이 필요하다고 해서 알게 되었다. 하루를 겨우 견디고 통증 이틀만이었는데 담당 의사가 단번에 알아본 것이 다행이었다. 당시 입시생 수업이 있을 때라 이삼일 입원 휴식 후 마약성 진통제를 맞으면서 견뎌야 했다. 이제 가끔 앓는 단순포진을 모르는 이들은 아기들이 앓는 수두처럼 생긴 작은 수포가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수선을 떠느냐는 둥 은근히 빈정대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모르는 소리다.   


 어쩌면 그들이 모르는 것은 얼마나 아픈지를 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말한다고 알 수 없는 것이라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것에 있는지 모른다. 앓을 만큼 혼자 앓다 녀석이 순해져 좀 봐주게 되면 폭력은 잠잠해진다. 그럴 때까지 속수무책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다. 일종의 순응인 셈이다. 어쩌다 얻은 단순포진은 찐득한 고약처럼 붙어 평생 같이 갈 수밖에 없으니 오히려 내가 봐주며 견뎌야 하는 것이다. 사실인 즉 견딜 만하다는 것은 익숙해진 만큼 이제 어쩌겠느냐는 체념이기도 하다.  


 우리가 느끼는 통증은 두 가지란다. 정신적 성장을 위한 통증과 체내 어딘가 이상이 있어 암시를 주기 위해 오는 통증이 그것이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기 위해서와 네 몸 어딘가 탈이 났으니 얼른 해결하라는 일종의 경고이다. 그러니 아파야 하는 것들이다. 그리 아프고 나면 한 동안 상처로 괴롭기도 하겠지만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더 나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한다. 그러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뇌의 시작과 아픔의 끝을 오가야 할까. 


 가끔 사람들을 만나면 평소 그의 모습이 아닌 모습으로 한 동안 힘들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가 있다. 저렇게 밝은 사람이, 저렇게 씩씩한 사람이 그랬었구나, 짐작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진즉 말을 하지 그랬느냐고 늦은 위로를 전하면, 말한다고 한들 어떻게 해 줄 수가 있었겠느냐는 아리송한 대답이 돌아온다. 말할 수 없는 통증을 혼자 다스릴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은 말할 수 있는 고통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누구에게나 그런 고통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같이 겪어보기 전엔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혼자 아파야만 하는 고통은 괴롭기도 하지만 외롭기도 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니 누가 알겠는가, 내가, 네가 지금 얼마나 아픈가를. 얼마나 외로운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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