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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희 Feb 09. 2022

기억만으로 우린 행복하다


       

 주말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주방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중이다. 느린 동작으로 먹을거릴 손질하고 있는데 예전 같지 않게 재미가 없다. 예전이라고 하면 온 가족이 저녁을 함께 먹을 수 있었을 때를 이른다. 그렇다고 아주 오래전 일도 아니건만 마음은 그리 느껴져 순간 손놀림이 시들해진다. 하긴 자식들이 제법 장성했다고 부모와 같이 할 수 있는 식탁에서 멀어진 지가 언제인데 새삼스럽게 울적함이라니. 그래도 어쩌다 운이 좋으면 함께 하는 날도 있기는 했다. 그나마 이젠 바로 곁에 없으니 그러기도 아예 쉽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래, 그런 때가 있었지.’ 빙긋이 웃어 보며 멀어져 버린 지난 시간들을 돌이키고 있다. 가족이 둘러앉아있는 둘레 밥상이 보인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그다지 넉넉하지 않았던 어린 날 우리 집 밥상은 지금 생각하면 초라했다. 그래도 접이식 둥근 밥상을 펴면서부터 찬이 올려질 때의 흥분은 고만고만한 사 남매를 수선스럽게 하기 충분했다.


 어쩌다 어머니는 요술쟁이처럼 이제는 없다던 갈치 토막을 잊고 있으면 내놓기도 하셨다. 특히 우리와 함께 있지 못하는 아버지가 지방에서 올라오실 때는 ‘엄마가 이번엔 어떤 반찬을 하셨을까’ 하며 무척 설레기까지 했다. 자주 먹지 못하는 풍롯불에 군 고추장 불고기가 등장하면 내 아래 동생은 의젓한 척했지만 서두는 젓가락질이 역력했고 그럴 때마다 매서운 엄마 눈치를 심하게 받았다.


 어쩌다 아버지 혼자서 늦은 저녁상을 받기도 하셨는데 그럴 경우 어디다 숨겨 두었던 것인지 어김없이 아버지 상에만 올라오는 찬이 있기 마련이었다. 들기름을 발라 구운 김이라든가 장조림이며 새우젓을 넣고 밥솥에 찐 계란인데 얼마나 고소하고 먹음직스럽던지. 철이 들었다고 나는 자리를 비켰지만 동생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나무라시며 과자도 아닌데 나누어 주셨다. 무엇보다 계란 프라이를 드실 때면 노른자는 아버지가 드시고 둥근 흰자를 사등분하여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던 다정한 모습이 눈에 보여 조금 부끄럽게 한다. 


 언제나 어머니는 식탁에 오를 것에 아버지를 먼저 생각하셨다. 그래서 나는 불만이었지만 남동생은 그것이 우러러 보였던가 보다. 결혼하면 그러지 않겠다는 내 생각과는 다르게 동생은 좋아하는 반찬은 모두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미리 하여 우리를 호호대게 했다. 그것을 빌미로 성장해서까지 특별식을 원할 때는 아버지를 앞세웠고 아버지는 즐겨 그렇게 하셨다. 그 외에도 아버지는 입맛이 까다로운 나로 하여 언제나 눈치껏 찬을 챙겨 주기도 하셨는데 내가 결혼을 한 후에는 식탁에 딸이 좋아하는 음식이 오를라 치면 목이 메 어머니 핀잔을 들으셨다고 한다. 


 같은 시절을 보냈던 절친한 친구와 나는 서로 겪었던 밥상머리 이야기를 하면서 통쾌해한 적이 있다. 대부분 형제가 많은 시절이기도 했지만 친구에겐 9남매라는 형제가 있었다. 갓난쟁이 동생에서 스물일곱 살 오빠까지 자라면서 그들의 식사 시간은 가히 전쟁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제법 괜찮은 찬이 나올라치면 당연히 어린 동생들에겐 불리한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래서 합리적인 아버지의 해결책은 배급이었다. 


 예를 들면 여러 조각낸 검은 김을 식탁도 아닌 각자 왼쪽 무릎 위에 공평하고, 공정하게 올려놓으셨다는 것이다. 그림을 생각하면 가히 코미디다. 덕분에 우리에겐 웃으면서 뒹굴었던 기억을 주셨다. 그렇게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아버지의 평화적 수단은 현명하기 이를 데 없다.


 내가 출가 후 밥상에 올라오는 찬에 아버지가 울먹이셨듯이 나도 때때로 그러고는 한다. 큰아이가 공부를 위해 이역만리 먼 곳에 머무르고 있는데 유난히 식도락인 아이가 즐겨하던 음식이라도 접하게 되면 괜히 목이 멘다. 어느 땐 아이와 화상 채팅을 하며 서로 식사를 같이 할 때가 있다. 그런데 그 기분이 아주 좋다. 물론 저는 저대로 나는 나대로지만 어쩌다 이곳에서 마냥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맥주잔을 기울일 때는 그런대로 모든 것을 초월하여 함께 먹는 느낌이다. 


 아버지는 변함없이 자식들과 식사하기를 좋아하시고 손주들이 즐기는 음식을 챙기고 싶어 하신다. 

 “언제 내려 오냐, 작은놈 좋아하는 그 집 고기 좀 먹여야 하는데”

 “너희들하고 둘러앉아 밥 한번 먹고 싶은데 내려와라”

 “올라가서 아범 하고 술 한잔 하고 싶다”


 그러실 때마다 데면데면한 대답으로 넘기곤 한다. 그러나 내가 어린 날 그때를 회상하며 행복감에 젖듯이 어쩌면 아버지도 그때를 종종 기억하며 인생이 후회스럽지 않다고 그래서 아름다웠다고 당신은 성공한 인생이라고 이야기하실지 모른다. 그러면서 이제는 이국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는 후손들을 생각하실 것이다. 언제 온 식구가 둘러앉아 남은 인생 몇 번이나 식사를 같이 할 수 있을는지, 그러기를 촉촉이 소원하시면서.


 마트를 돌다 혹은 식당에 들어가 아버지가 즐기시는 음식을 대하면 아버지 생각이 난다. 올라오신다는 기별이 오면 무엇보다 그것으로 식탁을 준비하는 것도 차라리 내겐 아버지를 맞는 너무 쉬운 방법이다. 이다음 언젠가 아버지만을 위한 큰상을 준비해야 할 때도 당신이 좋아하시던 음식만은 빠뜨리지 않고 올릴 생각이다. 그러기 전에 아버지와 한 번이라도 더 함께 할 수 있는 밥상을 마련해야 할 텐데 아이들과 그러기를 먼저 바라고 있으니 민망스럽다.


 가족이 함께 있는 식탁 주변을 생각하면 금방 생기가 돈다. 노란 백열등이 켜진 저녁 식사 시간은 상상만으로도 참 행복하다.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그때’ 그리고 ‘지금’ 좋은 사람들이 나와 함께 있어서이다. 그래서 가끔 어느 한 때 먼 기억을 더듬다 보면 그들이 있어 그것만으로도, 생각만으로도 인생이 정말 아름다울 때가 있는 법이다.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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