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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희 Feb 06. 2022

깜빡 속을 뻔했습니다

 나에게 아주 좋지 않은 버릇이 있다. 참기도 잘하지만, 게이지가 10 중, 8까지 오르면 그만 폭발해 버리거나 뒤도 없이 돌아서 버리는 기질이다. 폭발해 버리면 괜찮다. 돌아서 버리는 것이 문제다. 이제 안 본다는 의미이니 끝이라는 것이지.


 남의 말에 크게 좌우되지도 고까워하지도 않는다는 이순을 넘은 지 언제인지 모르고 마음 가는 대로 움직여도 그리 문제없다는 고희를 눈앞에 둔 나이인데 여전히 나는 그렇지 못하다. 최근 한 차례 그런 적이 있었는데 생각하면 참 부끄러운 일이다. 


 잘 참는다는 것은 내색하지 않고 그냥 견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것이 가끔 주변인들에게 너 바보니? 엄마가 천사야? 핀잔을 받게 한다. 가정과 일터, 교우 관계를 막론하고 ‘너와 나’의 관계를 정리하기 전까지는 그래야만 한다는 심지에서 그래 왔다.

  

 그러기 위해 기꺼이 속아주고 싶을 때가 있고 얼마든지 알아도 모른 척해주고 싶을 때가 있는 일이고, 상대에게 져 주어야 할 때도 있다. 아부라 하면 좀 어떤가. 흔히 비위를 맞추어 줘야 할 경우도 있는 법이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다는 것이고 좋은 관계를 다치지 않고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결코 이것이 일방적일 수는 또한 없다. 그러나 갈등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한편 쩨쩨하고 심약한 내 의지가 한몫한다는 것도 안다. 


 이번 경우에도 그렇게 견디다 그만 관계를 접고 말았다. 폭발하지 않고 돌아서 버린 것이다. 오죽했으면 네가... 위로 삼아 모두 이리 말했지만 그마저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 나이 되어 하나 더 남긴 오점이라 생각해서 일지 모른다,


 어느 행위는 상수처럼 옆에 붙어 평생 따라다니는 경우가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본인에게도 잊을 만하면 ‘그 일’을 기억하게 한다. 물론 좋은 기억일 경우도 있으나 내 경우에는 불편한 기억이다. 단순히 피해자였다는 볼상사나운 피해의식이 앞서 서일 테고 그런 데다 그렇게 된 것에는 내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만 이해를 바라서일지 모른다. 


 이제는 그때 감정이 많이 사라졌지만 10여 년 전쯤 놀랄 만큼 충격적으로 끊어버린 관계가 있다. 엄청난 피해자라는 상처를 안고, 어린 시절 시작되어 인생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관계를 몰락시킨 것이다. 


 누구에게나 아키 레스 건은 있다. 최소한 건드리지 말아야 할 자존심을 상대가 지켜주면 고마운 일이다. 보이고 싶지 않은 상처도 있다. 방법의 차이일 뿐 그 경우 위로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아니다. 당시 나는 많이 아팠다. 보는 것만으로도 쓰라리고 아려 스스로 상처를 회피했는데 적당한 누군가의 위로가 끊임없이 필요했던 때였다. 


 근사한 데 가서 차 마실까,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우리 2박 3일 여행 어때, 그 공연 괜찮다는데 너도 좋지? 그 제안만으로, 차를 마시며, 깔깔한 입맛에 맛있다는 것 먹으며, 여행 속 델마와 루이스처럼, 멋진 공연에 잠깐 취해 소리 내어 한 번 울고 털털 털고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아니 내가 바라던 위로였다. 


 그런데 둘 사이 요철 같은 관계였던 상대가 모두를 건드렸다. 위로라고 했을 터인데 그 위로가 나를 아는 그 답지 않게, 이유를 알 수 없게 건드렸다. 그의 양식과 심성을 한꺼번에 보는 듯해서 순간 아찔했다. 그리고 뒤돌아보지 않고 끝내 버렸다. 아무 말 없이.


 감정을 삭이며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상대는 때때로 함부로 무례했다. 그럴 때마다 불쾌를 넘어 상대에게 묘한 연민을 느꼈던 것은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우월감과 선민의식이 주는 심리를 분석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순간 모멸감은 컸다. 그런데도 수십 년을 같이 했고 늘  순간을 잘 넘겼다. 좋은 관계를 놓치고 싶지 않아, 지나온 시간이 아까워, 지금만 지나면 괜찮아질 테니. 혹은 속 좁은 내가 되기 싫었다. 


 그렇다고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도 아니고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도 아니다. 가끔 이런 나에게 둘을 아는 이들은 기막혀했는데 그럴 때마다 너희가 모르는 애틋함들이 있다고 일러주곤 했다.

 최근에 혈육 같이 아끼는 후배에게 비로소 그간의 이야기를 고해처럼 했더니, 언니 잘했어. 그래도 돼. 그런데 갑자기 무언가 훅 들어오면서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아주 최근 일이다.


 나만 피해자였다고 생각했던 일이, 나만 엄청나게 상처를 받았다는 아픔이 착각이었다는 사실이 어지럽게 괴롭혔다. 아무 말 없이, 오히려 무자비하게 단번에 끓어버린 관계에 상대가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니 내 상처 못지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얼마나 큰 배신감에 괴로웠을까 생각하니 그 괴로움도 알만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분노에 나만 너를 절친으로 생각했구나, 억울함까지 복잡했을 것이다. 그도 나처럼 인생의 절반을 실패했을지도 모른다는 자괴감과 함께.


 오랜 세월 따지지 못한 내 불찰이 큰 것도 모르고, 피해의식만 가지고 참아 왔다는 것에 깜빡 속아 더 큰 피해를 상대에게 준 것이다. 그동안 뒤돌아서 버린 모든 인연에게 그래 왔다는 것을 이제야 반성하게 한다. 그러니 문득문득 생각이 날지는 모르나 부디 모두 잊고 잘살고 있기를 바라고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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