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용은 좋다. 크레용을 손에 쥐면 아이가 된 것 같아 좋다. 어렸을 때는 크레파스와 사인펜으로 줄곧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어느 순간부터 크레용과 멀어졌다. 학창시절에는 연필보다는 샤프를, 사인펜 보다는 색깔 볼펜을, 크레용 보다는 형광펜을 자주 썼다.
나는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는데 갑자기 그림책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때 다시 크레용을 샀다. 크레용을 보면 그림을 그리고 싶다. 어렸을 때 손에 색깔을 묻히며 재밌게 그림 그리던 어린 내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책상 앞 정리함에 크레용을 옹기종기 새워뒀다. 꼭 책상을 지키는 크레용 병정들 같다. 내가 잠든 사이 '토이스토리'의 움직이는 인형들처럼 이들이 내가 그린 그림들을 지켜줄 것 같다. 그리다 만 그림들과 함께 꿈꿔줄 것 같다.
내 필통 속에는 항상 크레파스가 있다. 오늘의 기분에 따라 마음에 드는 색 몇 개를 골라 넣는다. 누군가를 기다릴 때 비장의 무기로 꺼낼 수 있도록. 카페에서 마음에 드는 풍경을 만날 때 노트에 채울 수 있도록.
크레파스를 손에 쥔 사람만 봐도 기분이 좋아진다. 왠지 크레파스를 손에 쥔 사람 치고는 나쁜 사람이 없다는 미신도 만들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