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비군 May 02. 2020

싱가포르 적응기

평소보다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단지 앞 길게 뻗은 공원에서 매일 하던 달리기도 오늘만큼은 걸렀다. 잘 입지 않던 슈트를 챙겨 입고 넥타이를 맸다. 싱가포르에선 인터뷰가 있는 구직자가 아니면 넥타이는 거의 하지 않는다. 오랜만에 매다 보니 길이가 잘 맞지 않아 여러 번 다시 해야 했다. 아침도 거르고 주차장에 내려갔다.


처음 싱가포르에서 운전을 했을 때 한동안 방향이 달라 고생했다. 운전석은 오른쪽이고 도로는 좌측통행이다. 더군다나 중앙선이 한국과 달리 흰 선이라 더욱 헷갈린다. 초반에 몇 차례 위기를 겪었고 이후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그래도 자동차가 적어 막히는 일은 거의 없다. 세금 때문에 아무리 작은 자동차도 기본 1억 이상이다. 아무튼 도로관리가 잘 되어 있고 교통체증이 없어 운전하기 퍽 쾌적하다.


평소보다 1시간가량 일찍 사무실에 도착했다. PC를 부팅하고 커피 한 잔 내려마신 후 회의실에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했다. 좁은 회의실에 12명이 모여 하루 종일 회의를 한다. 한국, 미국, 중국, 사우디 등 4개국에서 모인 8명의 이사들과 나를 포함한 Officer 4명이 아침 10시부터 오후 3시가 넘을 때까지 이사회를 한다. 내 업무는 이사회 사무, 재무/기획 총괄이다. 오늘 회의를 진행하고 실적 및 경영계획을 발표한다.


이번이 부임 후 첫 이사회다. 합자회사인 만큼 3년마다 Officer들이 교체된다. 3년 후 내 position은 partner사에서 온 후임으로 교체될 예정이다. 3년 뒤 본사로 복귀하기 전까지 이번을 포함 총 12번의 이사회를 해야 한다.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회의 시작 전까지 10분에 한 번씩 화장실에 갔다. 일부 설명이 복잡한 슬라이드에는 스크립트를 적었다.


이사회는 오후 3시 반이 되어서야 끝났다. 점심시간을 빼더라도 4시간 넘게 회의한 셈이다. 내가 맡은 Agenda로만 거의 회의 절반을 채웠다.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는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급격히 피로가 몰려왔다. 저녁에는 이사진과 식사를 해야 한다. 함께 이야기할 공통된 화제도 없고, 음식도 맛없는 뷔페식인 데다가 편하게 술을 마시기도 어려워 어떤 면에선 이사회보다 고역이다.


입사 당시에 사수는 내 토익점수를 듣더니 혹시 낙하산이 아닌지 의심했다. 아니 그 점수로 어떻게??? 거의 20년 전인 2002년에도 내 토익점수는 동기들 중에서 돋보이는 점수였다. 그리고 입사 후 약 2~3년 간 영어를 길에서 개똥 피하듯 멀리했더니 안 그래도 낮은 토익점수가 5백 점 대까지 떨어졌다. 승진시험 때문에 점수를 올릴 때까지 한동안 팀에서 설움을 당했다.   


중학교 1학년 때까지 부모님을 따라 가톨릭 성당을 다녔다. 나름 얌전한 어린이였던 나를 수녀님들은 꽤나 귀여워해 주셨다. 그중 한 수녀님이 신부님 옆에서 예배를 도와드리는 복사를 해보라고 추천해주셨다. 한 달간의 새벽예배 출석을 겨우 채우고 마침내 복사를 서게 됐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한두 살 많던 복사 형들에게 두들겨 맞고 2만 원어치 회수권(버스 승차권)을 빼앗겼다. 그 후 군대에서 초코파이 먹으러 교회 몇 번 간 걸 제외하면 단 한 번도 교회나 성당에 가본 적이 없다.  


서른 살에 토익 500점이었지만 마흔이 넘어 하루 종일 영어로 프레젠테이션을 한다. 철저한 무신론자지만 무슬림 CEO와 매일같이 일을 한다. 중동에서 온 CEO는 매일 두 번씩 기도를 하고, 라마단 기간에 철저히 금식을 하며 평소 할랄 식단을 지킨다. 일에 열정적이고, 한국어를 배우며 한국문화에 관심이 많다. 똑똑한 데다가 부지런하기까지 해서 같이 일하기 피곤하지만, 중동 사람들을 할리우드 영화의 악역으로만 알아왔던 내게 그들도 우리와 비슷한 존재임을 깨닫게 해 준 친구다. 정말 괜찮은 친구다.


도전하고 무언가를 이룬 것은 아니다. 그저 과거를 살아온 궤적이 현재로 이어졌을 뿐이다. 하지만 어떤 몇 번의 선택들이 나를 현재로 이끌었다. 적어도 지금은, 사소했지만 어쩌면 중요했던 그 몇 번의 선택을 한 당시의 나를 칭찬해주고 싶다.


이 글을 쓰면서 갑자기 궁금해졌다. 성당 뒷골목에서 나를 두들기던 형들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