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
요리와 관련된 나의 최초 기억은 엄마와 함께 경단을 빚던 5살에서 시작된다. 손이 닿을락 말락 하던 높이의 싱크대 앞에 서서 엄마가 하얗고 동그란 새알심을 삶아 한숨 식혀두면 어린이였던 나는 노란색 카스텔라, 검정 흑임자, 갈색의 팥고물등을 이리저리 굴리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다. 작고 알록달록한 모양이 예뻐 먹기 아까웠지만 만들다 보면 이미 두 어개는 입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쫄래쫄래 동네 빵집에서 카스텔라를 사 오면 부엌에서 체에 걸러 가루를 내시던 뒷모습의 엄마가 아직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사람은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애정을 표현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엄마에게 중요한 것은 ‘음식’이었기에 감사를 표하는 자리 나 가족들이 속상한 일이 있어 위로가 필요할 때면 어김없이 솜씨를 발휘하셨다. 이런 엄마가 자신의 환갑 생일상을 손수 차려 식구들을 초대한 건 가장 그녀 다운 방식의 애정표현이었다.
(2023.9월의 기록)
7남매 중 셋째인 엄마가 외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건 자개상 세트였다. 많은 물건 중 50년 전 할머니가 곗돈을 모아 장만하신 상을 고른 건 식사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엄마에게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지극히 T 유형인 엄마가 사과와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음식이었다는 건 독립 후 스스로 끼니를 챙겨 먹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 후 알게 됐다.
올해 환갑을 앞두고 엄마에게 필요한 건 없는지, 아니면 같이 모녀 여행을 가는 건 어떨지 물었다. 며칠 후 엄마는 할머니에게 받은 자개상을 수리하고 싶다 하셨다. 이제는 구할 수도 없는 낡은 자개상을 고치는 게 무슨 의미일지 짐작가지 않아 일생에 한 번뿐인 환갑인데 후회하지 않겠느냐는 말에 엄마는 마음이 그냥 그쪽으로 간다 하셨다.
이제는 거동이 불편하신 할머니 살아생전 온 식구가 둘러앉아 밥상으로 쓰던 고향 나주 물건으로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 바람이라 하시며 다른 식구들이 자개상에 대해 갖고 있는 추억, 이번 식사자리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라도 괜찮다 말씀하셨다. 그저 본인이 늘 고마운 가족들에게 마침 멀리 계신 외삼촌이 한국에 오셨을 때 따뜻한 밥 한 끼 먹이고 싶다 하셨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가족의 의미와 형태가 바뀌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개인적으로 나는 전통적 가족의 형태를 넘어 다양화된 가족의 모습과 인식 확대의 필요성을 지지한다. 그렇기에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정체성의 뿌리를 깊게 둔 엄마와 매번 열띤 설전을 벌이지만 오늘만큼은 함께 웃고 떠들며 밥을 먹는 ‘식구’들의 품 안에서 충만한 시간을 보냈다. 가족들과 함께 사진 속 화사하게 웃으며 흐뭇해하는 엄마가 행복한 환갑을 보냈다는 게 내게도 느껴졌다.
예전에는 내가 불안하고 무너져있을 때 따뜻한 말을 건네지 않는 엄마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는 무조건적인 지지가 필요한데 다른 사람의 입장도 헤아리는 말을 하는 엄마가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 대화를 하는 순간에도 늘 내 앞엔 따뜻한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이제는 안다.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슬퍼하지 않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위로하기도 애정을 표현하기도 한다는 것을. 나와 상대가 가치를 두는 무게가 다를지라도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나누기 위해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그 마음을 알고 나니 다름을 인정하며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주말이면 밥 먹으러 오라는 엄마의 전화에서 내가 사랑받고 있음이 느껴져 반갑다. 밥상에 빙 둘러앉아 시시콜콜한 이야기하는 즐거움을 위해 귀찮음을 무릅쓰고 엄마가 불러줄 때 냉큼 달려가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