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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Apr 07. 2024

삶은 읽힐 수 없는 한 권의 책을 쓰는 일

내 안에 살아 숨 쉬는 한 문장

삶을 누구나 읽을 수 있는 한 권의 책으로 옮기는 일은 요원해 보인다. 단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중요한 내용을 골라내고 또 골라내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최대한 많은 내용을 담기 위해 쓰고 또 쓰다 보면 그것은 보르헤스의 소설에서처럼 실물 크기의 지도를 그리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82세에 사망한 사람의 삶의 책이란 82년 동안, 혹은 그보다 더 오래 읽어야 하는 분량의 책이다. 그리하여 누구나 죽을 때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자신만이 읽을 수 있는 외로운 책을 갖게 된다. 자신만이 읽었고 읽을 수 있으며 단 한 번 낭독되었고 앞으로 결코 완독 될 일이 없는 책이다. 누구도 읽을 일 없는 이 책을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쓰는 태도를 우리는 품위라고 부른다. -<책의 말들>, 김겨울


가로 세로 뻗은 선들이 모여 직사각형을 이룬 작고 네모난 형태. 마치 문을 닮은 이 물성을 통해 한 페이지씩 넘기며 우리는 종이 위에 쓰인 활자들을 거쳐 천천히 다른 차원의 세계로 들어간다. 글자들이 모여 단어가 되고 서로 다른 단어들의 배열을 통해 문장을 이루며, 문장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촘촘하게 엮인 이야기가 된다. 그것들이 쓰이기 전에는 작가의 소유였지만 언어의 모습을 하며 독자에게 가닿는 순간 나의 이야기로 읽히게 된다.


책을 마주하는 시간 동안 나는 인물에 나를 투영해 자주 울고 웃으며, 아름다운 문장을 찬탄함과 동시에 질투를 느낀다. 10대에는 <해리포터>를 통해 우정과 모험을 배웠으며, 여행 에세이를 읽으며 사진과 글로 세계 곳곳을 누볐다.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으며 문장도 팔딱팔딱 힘을 실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우리가 ‘정상’이라 부르는 울타리 안에서 사실 ‘다름’을 배척하고 있다는 점을 <이상한 정상가족>을 읽고 난 후에야 인식할 수 있었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신체의 성장을 도운 음식물, 나를 둘러싼 관계들, 큰 임팩트를 남긴 사건들과 기억하지 못하는 경험들 수많은 기타 등등이 있겠지만 책은 단연 가장 지대한 역할을 했다. 지적호기심을 해소시켜주기도 하고 우연히 책에서 만난 문장들에 기대어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내게 책은 이런 의미이기에 삶을 책에 빗대어 표현하길 좋아한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무얼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 하고 있을 때에도 스스로에게 ‘Life is unwritten’이라 외치며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길 응원했다. 열정 가득했던 20대를 지나 30대에 이르며 결국 우리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 동안 자신만의 책을 쓰는 과정을 살아가고 있다는 말의 의미를 헤아리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쓰인 책은 누구에게도 읽힐 수 없기에 외롭고 지난한 과정이라는 것에 깊이 공감한다.


미정 : 먹고 자고 먹고 자고… 쓸데없이 허비되는 시간이 왜 이렇게 길까… 80년 생을 8년으로 압축해서 살아버려도 하나 아쉬울 것 없을 것 같은데…. 하는 일 없이 지쳐… 그래도, 소몰이하듯이, 어렵게, 어렵게 나를 끌고 가요. “가보자, 왜 살아야 하는지, 왜 그래야 되는지 모르지만, 사는 동안은 단정하게, 가보자.” 그렇게… 하루하루… 어렵게, 어렵게… 나를 끌고 가요…  - <나의 해방일지>, 박해영


끝없는 일 차선 도로를 걷다 가끔은 주위의 모든 것이 가려지는 터널 속을 통과하는 지루한 과정을 살아내는 게 인생인 건가 싶었던 때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는 많은 위로가 됐다. 작품 속 ‘미정’이라는 인물이 비록 가상의 인물이라 할지라도 이 인물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나만 지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 적어도 글을 쓰신 작가님도 생을 바라보는 시선이 나와 닮았다는 점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때론 힘에 부쳐 털썩 주저앉았다가도 겨우내 몸을 일으켜 앞으로 내딛어야만 하는 나는 ‘사는 동안 단정하게’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었다.


마음이 힘들었던 시기에 내 책의 표지는 세피아 색(검정에 가까운 적갈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 근육을 키우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제는 4차선의 도로 위에 함께 보폭을 맞춰 걸어가는 사람도 혹은 반대편을 향해 자신만의 길을 가는 사람들도 있으며, 걷다 보면 꽃도 나비도 만나고 그러다 또 비나 눈이 세차게 내리면 터널로 잠시 몸을 피하기도 하는 것이 나의 책을 써 내려가는 과정임을 안다. 다음 페이지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이 이야기의 끝은 어떤 결말을 맺게 될지 알 수 없다. 다만 오늘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다운 모습으로 남는 품위를 지키는 선택뿐이지 않을까. 생이라는 빈 종이 위에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써내려 간다. 결코 누구에게도 읽힐 리 없는 단 한 권의 책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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