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발견>, 타라 웨스트오버
p.29 산파 일은 엄마를 변화시켰다. 엄마는 일곱 자녀를 가진 성인 여성이었지만, 이전에는 한 번도 다른 사람의 의심이나 도전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책임자 역할을 수행한 적이 없었다. 가끔 분만을 한 후 며칠 동안 엄마한테서 주디한테서 느꼈던 무거운 존재감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주디는 엄마에게 산파 일을 가르친 사람) 머리를 고집스럽게 돌린다든지, 도도하게 눈썹을 추켜세운다든지 할 때 말이다. 엄마는 화장하는 일을 그만뒀고, 화장하지 않은 것에 대해 사과하는 일도 그만했다.
엄마는 분만 한 건당 500달러 정도를 벌었고, 그것은 산파 일이 엄마를 변화시킨 또 하나의 요인이었다. 갑자기 엄마에게 돈이 생긴 것이다.
ㄴ 저자 아버지의 피해망상과 종교적 원리주의하에 한 가정의 테두리에만 갇혀 있는 어머니는 ‘일’을 통해 변화했다. 사회에서 하나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하고 책임지는 단계로 한 발짝 나아간다. 화장을 하지 않으면 하루 종일 주변 사람들에게 사과를 하던 엄마는 꾸미지 않는 것에 대해 더 이상 사과하지 않는다. 보이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에 안정감을 느끼던 사람이 일을 하면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채워진 것이다.
(한편, <더 글로리>에서 현남은 자존감이 채워지면서 빨간 립스틱으로 자신을 가꾸기 시작한다. 자신을 가꾸는 행위는 자신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사랑하는 나를 예쁘게 가꿔주고 싶은 마음.)
애정으로 충만하게 채워진 사람은 ‘꾸밀 것을 선택’하는 것이 가능하다 생각한다. 나를 위해 꾸밀 것인지, 나를 위해 꾸미지 않을 것인지.
‘업’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끊이지 않지만 매번 ‘직업’에 대한 의미를 돌이켜 보면 원점으로 돌아온다. 사회에서 나의 이름인 직업. 이 사회에서 나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싶은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수익을 창출한다는 것은 원시시대 수렵채집인들이 자급자족 하던 모습과 동일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삶의 주도권을 넘기고 싶지 않은,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나에게 스스로를 입히고 먹여 살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출 필요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니 직업이라는 건 이 사회에서 ‘나’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활동임이 분명하다. (허나, 직업을 통해서만 자아실현이 가능하다 생각하진 않는다. 우리의 하루는 ‘일하는 시간’이 전부가 아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