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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r 10. 2023

타인을 통해 보는 나의 세계

<죽은 자의 집 청소>, 김완

p.55 하지만 이 일을 하루 이틀 되풀이하고, 산을 옮기는 고달픈 기적을 한 해 두 해 반복하다 보니 시나브로 내 생각의 날카로운 면은 물러지고 감정의 뾰족한 데는 무던하게 다듬어졌다.

ㄴ 밑미 선언미팅 때 유월님이 던져 주신 ‘에세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잔상으로 남아 있다. 본질적인 질문에 쉽게 답을 내리기 어려워 며칠 째 머릿 속에 둥둥 떠 다니고 있다. 생각의 시선이 ‘나에게 에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방향으로 향해 있다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분들의 시선을 수집하고 있다. 요아님의 브러치 글과 밑미 라디오 보리님 편을 들으면서 일기와 에세이의 차이를 인식하게 되었다. 자유롭게 유영하던 질문들을 내 안으로 뿌리내려 본다면, 나에게 일기는 가감없이 글로 감정을 쏟아내고 그 과정으로 나를 보듬어 주는 시간이라면 에세이는 정제된 감정을 무던하게 다듬어 한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 나를 통찰한 결과물일 것이다.


p.101 스스로 지하에 유폐한 생활, 어둠 속에 칩거하며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쓰고 홀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가 무엇에 몰두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집에 머무는 며칠 동안 그에 대한 의문을 거듭할수록 깨달은 것이 있다면, 이곳에서 무엇을 보았든 그것은 그저 내 생각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이 집을 치우며 지독한 고독을 보았다면 그것은 결국, 내 관념 속의 해묵은 고독을 다시금 바라본 것이다. 이 죽음에서 고통과 절망을 보았다면, 여태껏 손 놓지 못하고 품어온 내 인생의 고통과 절망을 꺼내 이 지하의 끔찍한 상황에 투사한 것일 뿐이다. 젊은 나이에 미쳐서 스스로 돌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한 불행한 남자를 보았다면, 마치 인생의 보물인 양 부질없이 간직해온 내 과거의 불행함을 그 남자에게 그대로 전가하고는, 나는 결백하답시고 시치미 떼고 있을 뿐이다.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을 바라보듯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다. 그것이 내가 이 지하 방에 관해 알게 된 유일한 진실이다.

ㄴ 에전에 <숲 속의 자본주의자, 김혜윤> 책에서 ‘타인에 대한 내 반응이 내가 누구인지 가장 정확하게 알려준다.’는 문장을 읽고 한 번에 와닿지 않았었다. 당시에는 자의식 과잉(?)이었는지ㅋㅋㅋ ‘내가 나를 가장 잘 알텐데 타인의 존재가 왜 필요한거지?’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깨달은 중요한 점은 타인의 존재가 아닌 ‘나의 반응’이었다. 끊임없이 일을 벌리고 수습하는 사람을 보며 ‘왜 가만히 있지 못하고 힘든 일을 만들어서 할까?’ 반응했던 이면에는 ‘변화의 욕구’가 있었고, 나와는 다른 ‘실행력’을 갖춘 점을 부러워했던 것이다. 하나의 사건과 한 사람을 통해 우리는 저마다 다른 해석을 한다. 그리고 그 해석은 내가 누구인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나의 세계다.   

거울이라는 반사체가 있어야만 자기 모습을 알게 되듯이
오히려 타인을 통해서 자기를 더 잘 보게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타자에 대한 탐구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 <알쓸인잡 1화 중>, 김영하

스스로 내면을 들여다보는 과정도 매우 중요하지만 가끔은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 적나라한 나의 민낯을 보게 될 때면 부끄러웠다가 나를 인정함과 동시에 겸손해지는 과정을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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