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와 헤어지면 리스본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구시가의 굽이굽이 좁은 골목을 무작정 걷다가 밤이 되면 별빛 일렁이는 강물을 바라보며 와인 한잔하겠다고. 그러면 이별의 상처도 금세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고 나는 아직도 리스본에 가보지 못했다.
결혼을 하고 일상이 버거울 때면 나는 항상 그곳을 생각했다. 20대의 대부분을 살았던 그곳.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하기 전까지 나는 그곳에서 혼자 살았다. 하루쯤 날 잡아 아무도 모르게 그곳에 가야지. 거기서 좋아하는 국숫집에 가서 한 끼 때우고 중고서점에 가야지. 손 때 묻은, 철 지난 책들을 뒤적여야지. 어쩌다 이 곳까지 왔을까 아무도 모를 책들의 시간을 상상하며 시간을 보내야지. 그리고 해가 뉘엿뉘엿 지면 익숙한 골목길을 따라 공원에 가자. 빼곡한 가로등 아래 울창한 나무 아래 서면, 이곳에서 흘려보냈던 온갖 생각들이 날 찾아오겠지. 실제로 아무도 모르게 그곳에 간 적은 없지만 생각만으로도 엄마 몰래 높은 선반에 숨겨진 사탕 한 알 훔쳐먹은 아이처럼 묘하게 기분이 좋아진다.
나이가 들어도, 대부분의 것들에 익숙해져도 도망치고 싶은 순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럴 땐 늘 그곳을 생각한다. 그곳은 가끔은 리스본, 가끔은 신림, 가끔은 청산도, 가끔은 강화도의 어느 책방, 가끔은 양평의 스콘이 맛있는 카페, 가끔은 시인이 운영하는 갤러리, 가끔은 브런치가 맛있는 식당이 된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는 나만의 비밀의 화원. 하지만 아직 가보지 못한 그곳.
시간이 난다면 조용히 책을 읽으면 쉴 수 있는 작은 서점에서 북 스테이를 하고 싶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2박 3일 정도면 내 영혼이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월요일 아침 네모난 책상에 앉아 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나는 빛나는 호수 옆 빨강머리 앤과 다이애나가 우정을 나누던 초록색 지붕을 상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