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와상과 카페라테

by pahadi

그때부터였나. 내가 크로와상과 카페라테를 좋아하게 된 게...


대학 졸업 후, 잠시 여유가 난 틈을 타 유럽여행을 떠났다. 아르바이트를 같이 하던 친구와 함께였는데 우리의 우정은 30일간의 고난을 함께하기에 턱없이 얄팍했다. 그걸 떠나고 나서야, 부딪치고 나서야 알았다. 가까운 듯 멀었던 우리의 사이는 확연하게 멀어졌고 여행을 팍팍해져 갔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몸도 지치고 마음은 더 지쳐갈 때쯤 우리는 로마에 도착했다.


테르미니 기차역에서 숙소까지는 거리는 꽤 가까웠다. 지도상으로는 커다란 캐리어를 가지고 거뜬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다. 구글맵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믿을 건 튼튼한 두 다리와 인쇄해 둔 종이, 여행책자뿐이었다. 서먹한 우리는 꼭 필요한 말만 나누며 기차역을 나섰다. 그런데 웬걸. 코 앞에 있을 것만 같았던 게스트하우스는 당최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꼬불꼬불한 로마의 골목들은 우리 사이처럼 좀처럼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다. 여기가 저기 같고, 저기가 여기 같기만 한데, 설상가상으로 아무도 우리 손에 들린 꾸깃꾸깃한 지도를 눈여겨 봐주지 않았다.


점점 게스트 하우스 찾기가 보물찾기 마냥 허무맹랑하게 느껴졌다. 쌀쌀한 날씨에도 불고하고 캐리어를 쥔 손은 축축해져 갔다. 꾸깃꾸깃을 넘어 너덜너덜해진 종이를 마지막 동아줄처럼 움켜쥔 채 분위기는 폭풍전야로 치닫고 있었다. 앞선 사람은 손 놓고 있는 뒷사람이 미워서, 뒷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여기저기 헤매는 뒷사람이 미워서 마음에서 열불이 났다.


"야. 잠깐만, 여기 아닌 것 같아." 결국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위급상황이었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깨고 비상대책회의를 열었지만 뾰족한 수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다시 한번 사람들한테 물어보자. 저기 가게에 가서 물어보자."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길을 물었지만 몇 번이나 거절당한 차였다. 그래도 어쩌겠느냐 별 다른 수가 없었다. 결국 아무도 모른다는 게스트 하우스 지도를 들고 가게 문을 두드렸다.


가게 주인은 무심하게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이런! 우리가 그렇게 찾던 그곳이 바로 위에 있었다. 그제야 손바닥만 한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몸을 뉘일 수 있다는 것보다 다행이었던 건 낯선 도시의 밤거리를 헤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호기롭게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역시나 엘리베이터가 없다. 좁고 가파른 계단 앞에서 커다란 캐리어가 어마어마한 애완견처럼 느껴졌다. 주인을 우습게 안지 오래인 이 애완견은 좀처럼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우리는 망설임 없이 커다란 캐리어를 함께 들었다. 힘을 합쳐 한 계단 한 계단씩 올랐다. 조심하라는 말이 오갔다. 함께지만 혼자였던 여행에서 오랜만에 느껴지는 "함께"였다.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하자 다정한 주인 부부가 우리를 반겼다. 방을 배정받았는데 같은 방을 쓰는 사람이 참 낯익다. 테르미니 기차역에서 함께 내렸던 뉴욕에 산다는 그녀였다! 그녀는 벌써 집을 다 풀고 여유롭게 침대에 기대어 책을 보고 있었다. 우리는 얼마나 헤맨 것인가.


게스트 하우스 주인아주머니가 작은 종이 조각을 건넸다. 아침식사 쿠폰이었다. 저렴한 가격에 아침까지 제공해주다니! 그간 고생이 다 잊히고 횡재한 기분이 들었다. 식사 장소는 바로 밑 레스토랑. 우리를 구원해준 바로 그곳에서 아침식사까지 준다고 했다. 길을 헤매느라 하루를 날린 우리는 피곤에 지쳐 저녁도 거르고 잠자리에 누었다. 아니, 다시 돌아올 길이 걱정되어 차마 나갈 수 없었다.


이른 아침, 배고픔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친구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아침 먹으러 갈래?" 갓 구운 크로와상과 따뜻한 카페라테가 나왔다. 아, 따뜻하고 향기롭다. 배가 부르면 누구나 말랑말랑해진다. 통통하게 부푼 크로와상처럼. 친구와 눈이 마주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배시시 웃음이 베어 나왔다. 그때부터였나. 내가 카페라테와 크로와상을 좋아하게 된 게.


그게 벌써 10년 전 일이던가. 오늘 아침도 카페라테와 크로와상이다. 그런데 그때 그 맛이 안 난다. 찌푸린 얼굴의 너도 없고, 네가 한없이 미웠던 나도 없고, 집채만 한 캐리어도 없고, 돌고 돌았던 좁은 로마 골목도 없고, 집으로 갈 날만 손던 향수병도 없고,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열정적이던 젊음도 없으니 그럴 수밖에. 그 맛이 참 그립다. 참 맛있었는데. 참 좋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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