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야 할 때 사라지는 것

by pahadi

버려진 이앙기가 처량하게 비를 맞고 있다. 언제가 이맘때쯤 하염없이 모를 심었을 이앙기는 세월 따라 쓸모도 잃어버린 채 그저 흉물이 되었다.


한 때는 어느 집안의 애지중지한 보배였겠지. 열심히 몸을 굴려 모를 심고 벼를 길러 누군가의 배를 채우고 누군가의 자식들을 길러냈겠지. 그렇게 모질 없던 시간이 생의 황금기였구나.


빛바랜 몸과 군데군데 더해지는 녹. 차라리 엄청난 열기 속에 깔끔하게 사라지는 게 복되련만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바람결에 조금씩 작아지다 보면 언젠가 사라질 수 있을까? 그건 언제쯤일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눈 앞에 펼쳐진 푸른 바다. 밀물과 썰물이 너의 남은 길고 긴 시간을 조금이나마 위로해주길.


비가 와서 모든 게 처연해 보이는 건지, 내 마음이 그런 건지 모르겠다. 사라져야 할 때 깔끔하게 사라지는 것도 복이구나. 너보단 내 처지가 나은 것 같아 안도하다가 이내 같잖은 죄책감이 밀려온다.


내가 이곳에 다시 왔을 때, 부디 네가 이곳에 없길. 바람을 타고, 빗물을 타고 자유롭게 여행 중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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