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8살쯤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 언니와 나를 낯선 아파트로 데리고 갔다. 텅 빈 아파트에서는 새 냄새가 났다. 벽지도 새 거, 방바닥도 새 거, 반짝반짝 유리창도 새 거였다. 엄마 얼굴에 웃음꽃이 가득 폈다.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는 게 이런 얼굴일 것 같았다. 엄마가 말했다. "이제 여기 우리 집이야. 여기로 이사 올 거야."
엄마가 기분 좋으니 덩달아 우리도 신이 났다. 새 아파트를 다다다 뛰어다니니 기분이 더 좋았다. 엄마는 우리를 화장실로 데려갔다. 거기에 욕조가 있었다. "엄마 우리 여기 들어가도 돼요?" 작은 욕조가 어린 내 눈에는 가장 멋진 수영장으로 보였다. "그럼!" 자신감이 묻어나는 엄마의 목소리가 참 낯설었다.
엄마는 슈퍼에 가서 간단한 목욕용품을 사 오셨다. 언니와 나는 따뜻한 욕조에서 첨벙첨벙 깔깔 신나게 놀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엄마는 바닥에 열심히 니스칠을 하셨다. 몇 번을 바르고 말려야 되는 귀찮은 일이었지만 그나마 저도 엄마에게는 내 집 마련을 실감할 수 있는 유쾌한 일이었다.
나는 그 집이 좋기도 하고 싫기도 했다. 깨끗한 새 아파트여서 좋았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모든 추억이 있는 동네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기찻길 너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예쁜 꽃들과 곤충들. 슬플 때면 쪼르르 달려가 하염없이 바퀴를 돌렸던 버려진 리어카. 늘 우르르 몰려다니는 동네 꼬마들. 안 사정 바깥 사정 모르는 게 없는 이웃 어른들. 나는 그런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이 행복해 보였기 때문에.
이사 가기 전 날 옆집에 사는 이소 엄마는 우리를 데리고 비싼 옷 가게에 갔다. 그리고 언니와 나에게 예쁜 원피스를 사주셨다. 예쁜 원피스가 어쩐지 슬퍼 보였다. 정말 이별이 실감 났다. 자주 왕래하자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새 아파트에서 새로운 날이 시작됐다. 집은 좋아졌지만 우리는 더 가난해진 것 같았다. 매일 밥상에는 김과 반찬만 올랐다. 엄마는 부업을 더 열심히 했다. 아마도 이자를 충당하느라 더 빠듯했던 것 같다.
어느 날부터 바쁜 아빠가 더 바빠졌다. 아빠는 법원에 왔다 갔다 하셨다. 누런색 종이봉투가 식탁 위에 쌓였다. 아빠 엄마의 대화 속에 이소 엄마가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아빠는 늘 화가 났고 엄마는 울었다. 보증을 서준 게 잘못되었다고 했다. 일 년 남짓 살았던 그 집은 이제 다른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 엄마의 화양연화는 너무 짧게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