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는 걱정

by pahadi

내 혈액형은 0형이다. 남편의 혈액형은 B형이고 시부모님의 혈액형은 B형과 O형이니 아이의 혈액형도 B형이나 O형일 것이다. 짐작은 가지만 확실히는 모른다. 아이를 낳은 병원에서는 출산 직후 아기의 혈액형이 정확하지 않다고 혈액형 검사를 하지 않았다. 아이의 가느다란 팔에 주삿바늘을 꼽을 엄두가 안 나서 5살이 되도록 혈액형 적는 칸은 늘 빈칸이다.


혈액형은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는데 문득문득 RH-이면 어쩌나라는 걱정이 들었다. 어릴 적부터 병원 출입이 잦은 터라 아이의 건강에 관해서라면 곱절로 예민해진다. 나와 남편 둘 다 RH+이기 때문에 의학적으로 말이 안 되는데 망상은 끝없이 펼쳐졌다. 세상에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수 없이 있어왔잖아. 만약 RH-인데 수혈이 필요한 경우가 생기면 어쩌지. 만약에. 만약에. 이 정도면 정신병이 아니지 싶다.


결국 극에 달한 상상력으로 혈액형 검사를 하기로 했다. 주사 맞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나는 차마 아이의 팔을 붙잡고 있을 수가 없어 남편이 연차까지 냈다. 함께 소아과에 방문했는데 의사 선생님이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할 수 있을까요?" 제 생각도 그래요. 할 수 있을까요?


아이와 남편을 주사실로 들여보내고 대기실에 있을 수가 없어 병원 문 밖 계단을 서성거렸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는지 나도 이해가 잘 안 된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상한 일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에 이 정도는 넘어가기로 하자. 한참이 지나도 아이와 남편이 나오질 않는다. 걱정이 된다. 다행히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드디어 아이와 남편이 나왔다. 지혈이 잘 안 돼서 오래 걸렸다고 한다. 아이는 울지도 않고 씩씩하게 피를 뽑았다. 역시 나보다 낫다. 간호사 선생님께서 쥐어주신 비타민 7개를 전리품처럼 의기양양하게 자랑했다. 하는 김에 B형 간염 항체 검사까지 하기로 했다. 또 걱정이 시작되었다. B형 간염 항체가 없으면 어쩌지?(없으면 예방주사 맞으면 되잖아!)


다음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요새 스팸전화가 많이 와서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소아과입니다" 드디어 때가 왔다. "혈액형은 B형 RH 양성이고 B형 간염 항체도 있습니다." 그럼 그렇지. 의학적으로 RH-일리 없잖아. 역시나 B형이구나. B형 같더라니. 항체도 잘 있다니 다행이네. 아니면 예방주사 맞으며 되지만.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스스로가 민망해진다. 내가 하는 대부분의 고민과 걱정이 이런 것이다. 일종의 망상. 이 잘못된 상상은 나의 나약함을 먹고 쑥쑥 자라 결국 어마어마한 괴물이 되어 내 인생을 허비하게 만든다. 그걸 너무도 잘 알면서도 이 걱정들을 놓을 수가 없다.


취미가 뭐냐고 물으시면 걱정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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