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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hadi Nov 06. 2024

불현듯 계속하게 되는 힘

  ‘무슨 노래를 들을까?’ 유튜브 뮤직 앱을 켠다. 가장 위에 있는 ‘빠른 선곡’ 카테고리에 자주 듣는 노래 제목이 보인다. 보통은 이 카테고리에서 선곡하거나 무작위로 재생되는 노래를 듣지만 오늘은 조금 더 신중하게 고르고 싶다. 여기저기 기웃대다가 ‘잊고 있던 좋은 음악’ 카테고리에서 밴드 ‘브로콜리 너마저’의 노래를 발견했다. ‘그래! 이거지’

  쌀쌀한 계절이 되면 어김없이 ‘브로콜리 너마저’의 노래가 생각난다. 이들의 노래가 땡기는 걸 보니 겨울이 오고 있긴 하나보다. 나에게 ‘브로콜리 너마저’는 한 해가 끝나가는 쓸쓸함을 의미한다. 아, 또 한 해가 가는구나. 별일 없이, 한 일 없이.

  익숙한 가수 이름 아래 낯선 노래 제목이 보인다.

  - 새로 발매된 곡 <너무 애쓰고 싶지 않아요>

  지난달에 발매된 신곡이다. 예전이라면 발매일을 손꼽아 기다렸을 텐데 신곡 발매 소식도 몰랐다. 뭐가 그리 바쁜지. 나는 너무 많이 변해버렸는데 노래는 여전했다. 제목만으로 내 마음에 쑤욱 들어와 버린 노래. 경건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노래를 들었다.    


너무 애쓰고 싶지 않아요. 새 신발을 신고 나온 날처럼 걷다 보면 언젠가 무뎌지겠죠. 신발의 목적은 원래 닳아가는 것 아닐까요. (중략) 삶도 노래도 뭔가 이뤄내면 괜찮을 줄 알았죠.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시간을 이길 수 없죠. 사랑도 사람도 나의 모든 게 닳아요. 꿈도 마음도 꿈과 사랑도 내가 갖고 싶던 것도 가졌다고 생각한 것도 모두 아름답고 쓸모없는 작은 돌 하나
- 밴드 브로콜리 너마저의 <너무 애쓰고 싶지 않아요> 중에서 -        


  잔잔한 음률에 담담한 목소리 그리고 내 마음에 길게 자욱을 내는 한 문장, ‘너무 애쓰고 싶지 않아요’. 어떤 문장들은 너무도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형태로 찾아온다. 이 문장이 오늘 나에게 그렇다. 옅은 음표를 타고 날아온 문장이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묵직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너무 애쓰고 싶지 않아요.

  노래를 듣다가 책상 위에 놓인 책에 시선이 머문다. 무레 요코의 <나랑 안 맞네 그럼 안 할래>. 제목만 보고 빌린 책이다. <너무 애쓰고 싶지 않아요>와 <나랑 안 맞네 그럼 안 할래> 이 노래와 책에서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걸까. 왜 이 노래를 틀었던가. 왜 이 책을 골랐던가.

  아무것도 모르고 공부만 하던 학생 시절이 가고 초보 직장인의 고군분투 밥벌이 시절을 지나 정신없이 엄마가 되고 아이를 키우다 보니 오늘이 되었다. 엄마라는 이름 아래 '나'라는 존재는 지워졌다. 그렇게 긴 쉼표를 찍고 이제 다시 새로운 궤도로 나아가야 할 때가 왔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무엇을 하고 싶은가. 오래전에 물었어야 할 그 질문을 이제라도 던져본다. 시키는 대로만 하던, 닥치는 대로만 하던 시간을 흘려보내고 이제 정말 내가 선택한 길을 가려고 한다.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질문 끝에 글쓰기를 시작했다. 아무도 나에게 시키지 않은 일, 입에 풀칠하고 사는 일과 전혀 상관없는 이 일을 순도 100퍼센트 나의 의지와 욕망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시작이 그러하듯, 나의 글들은 견딜 수 없이 남루하고 남루했다. 더 잘하고 싶은 마음으로 더 열심히 써야 했지만,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은 두려움이 되었다. 쓰고 싶지만 쓰고 싶지 않은 비겁한 마음, 하고 싶지만 그만두고 싶은 못난 마음들이 득실득실했다.

  그러다 우연히 김은숙 작가의 인터뷰를 보았다.      

    

당연히 재능이 있으면 좋겠죠. 제일 이해 안 될 때가 한20대 중반, 30대 초반 친구들이 '저는 재능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할 때에요. 그럼 재능이 없는 거예요. 재능이 있으면 모를 수가 없어요. 어떻게든 재능이 비집고 나와요. 주변에서 다 알아보고요. 너는 글을 잘 써. 너는 노래를 잘해. 달리기를 잘해. 그렇게 백번 넘게 들어봤어야 합니다. 한 번도 못 들어봤는데 혼자 몰래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럼 재능이 없는 거예요. 빨리 그만둬야 합니다. (그런데 애매한 재능도 있잖아요?) 그럼 제가 하는 방법을 써야 해요. 엄청나게 노력해야죠.
- W방송작가 2024년 4월호 김은숙 작가 인터뷰 중에서 -

          

  직면하고 싶지 않았던 진실을 꺼내어 내 눈앞에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촌철살인 같은 말이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고민하느라 재능을 간과했다. ‘재능은 어떻게든 비집고 나온다’라는 말이 뿌옇다가 점점 선명해졌다. 아뿔싸! 그랬다. 나는 글쓰기에 재능이 없던 것이다. 쓰고 싶지만 쓰고 싶지 않다는 비겁하고 애매한 말이 ‘그만해야 한다’는 단언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시작한 일을 이렇게 쉽게 자발적으로 그만둘 수는 없었다. 재능의 한계가 곧 내 삶의 한계인 것 같아서 딱 잘라 그만한다고 할 수 없었다. 나의 무능함과 나약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에게 누군가 말해주었으면 했다.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너랑 안 맞네. 그럼 안 해도 괜찮아’ 내가 듣고 싶던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다시 노래에 귀를 기울인다. 원하는 말을 가능한 가장 다정한 형태로 듣고 나니 머릿속과 마음속이 비질을 한 듯 깨끗해졌다. 깨끗해진 자리에 스멀스멀 청개구리 같은 생각이 자랐다.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 언제든지 그만두어도 괜찮다 하니 그냥 더 해봐도 되지 않을까. 그래, 너무 애쓰지 말고 즐길 수 있을 때까지만 해보자. 어차피 잘하려고 시작한 일이 아니라 좋아서 시작한 일이니까 괜찮다. 재능이라는 말이 내 앞으로 가로막아도 ‘저는 즐거워서 하는 건데요.’라고 대꾸하면 된다.

  도돌이표처럼 다시 시작점에 왔다. 무엇이든지 선택할 수 있는 기로에서 나는 다시 한번 글쓰기를 선택했다. 이 다짐을 단단하고 튼튼하게 하기 위해 단비 같은 글귀를 꺼내어 읽는다. 꼬깃꼬깃 적어두었던 이 글을 버팀목 삼아 다시 시작이다.       


사회에서는 재능에 천재성을 부여하지만 화려한 껍질을 벗긴 재능이란 어느 날 갑자기,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불현듯 그것을 ‘계속하게 되는 힘’에 다름 아니다.
- 천선란 작가의 <아무튼 디지몬> 중에서 -     


  이런 정의라면 나도 재능이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어느 날 갑자기,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불현듯 글을 쓰고 있으니까. 계속 글을 써도 되지 않을까. 잘 쓰지는 못해도 계속 쓰는 건 할 수 있으니까. 김은숙 작가의 인터뷰를 찬찬히 다시 읽는다. 재능 대신에 노력에 방점을 찍는다. 재능이 없으면 노력이라도 들이부어 보자. 애매한 재능도 없다고 누군가 말하면 천선란 작가의 재능에 대한 정의로 반박해 보자. 정신을 차려보니 불현듯 계속 쓰고 있었다고.

  창밖을 바라보니 벌써 노을이 진다. 길었던 해가 어느새 짧아졌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순간에도 무언가 계속 변하고 있다. 나도 그럴 것이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순간에도 계속 나아지고 있을 것이다. 해는 더 짧아지고 겨울이 오고 별 소득 없이 올해도 끝나겠지만 충분히 괜찮다. 다음 해가 있다는 믿음직스러운 약속이 있으니까. 다음 해에도 열심히 써보자. 시간의 힘을 믿어보자. 그 어떤 것도 시간을 이길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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