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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hadi Sep 21. 2024

추석과 무화과

더위가 누그러지고 짧은 소매가 어색해질 때쯤이면 추석이 찾아온다. 빛나는 보름달을 보니 무화과가 먹고 싶다. 나에게 추석은 송편보다 무화과에 가깝다.

     

우리 할머니 집은 마을에서 가장 끝집이었다.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다시 한참을 걸어 어둑어둑해질 때쯤 마을 어귀에 도착한다. 온 동네 개들의 환영을 받으며 마을을 거슬러 올라가면 능소화 향기 너머로 보름달빛 가득한 할머니네 집이 보인다. 반가운 할머니의 그림자가 점점 더 커지더니 내 작은 그림자 위로 겹친다. “아유! 내 강아지 왔는가.”     


고독에 가깝도록 조용한 할머니네 집이 시끌벅적해지는 건 일 년에 딱 두 번 있는 일이다. 설과 추석. 오늘은 추석이다. 아침부터 시끌벅적한 아이들 소리에 대청마루가 휘청인다. 사촌 언니, 오빠, 동생들과 깔깔거리다 보면 어느새 아침 이슬이 자취를 감추고 해가 중천에 떠오른다. 이제 우리의 무대를 넓힐 차례다. 목적지는 마당을 지나 옆집 폐가다   


내가 기억하는 모든 순간을 통틀어 이 집에 사람이 산 적은 없었다. 할머니 기억 속에서도 희미해진 이웃사촌들이 영영 사라진 후, 이곳은 우리의 아지트가 되었다. 반기는 이 하나 없었지만 마당 한편에 자리 잡은 늙은 무화과나무가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우리는 매번 그립고 반가운 옛 친구처럼 늙은 무화과나무를 찾아갔다.    

  

늙은 무화과나무 앞마당에서 우리는 어른들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그곳은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놀이터였다. 정글처럼 무성하게 자란 잡초들 사이로 옛 주인이 버리고 간 물건들이 보물처럼 숨겨져 있었다. 우리는 용감함 탐험대가 되어 야생 동물(벌레)과 맞서며 보물(버려진 물건)을 찾아 헤맸다. 우리의 모험은 언제나 비장하고 진지하고 흥미진진했다. 우리는 어렸고 세상은 한없이 넓었지만 무화과나무가 한결같이 지켜보고 있었기에  두렵지 않았다.  

   

늙은 무화과나무는 지나온 세월처럼 무성한 가지들을 자랑했다. 가지치기 한 번 겪어보지 못한 가지들이 제 마음대로 삐쭉삐쭉 자라고 듬성듬성한 잎사귀들 사이로 여기저기 무화과 열매가 열렸다. 돌보는 이가 없어 풍족하게 맺지는 못했지만 우리 말고는 찾는 이가 없어 적당한 양이었다. 신나게 놀다 배가 출출해지며 모두 무화과나무로 달려들었다. 하나, 둘 따는 대로 입속으로 바쁘게 사라졌다. 초록색 얇은 껍질 속에 붉은 속살은 한없이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할머니는 늘 늙은 나무라 맛이 없다며 손사래 치셨지만 우리에게는 일 년에 딱 한 번 먹는 귀하고 신나는 간식이었다.      


다시 추석이다. 할머니의 주름진 손은 이제 볼 수 없고, 함께 무화과를 나눠먹던 사촌들도 얼굴 본 지 오래지만 그래도 괜찮다. 그 시절, 아무 걱정 없이 설레고 신나던 시간들이 무화과 열매 속에 꼭꼭 담겨있으니까. 매년 이맘때가 되면 무화과를 먹으며 그 시절을 추억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 늙은 무화과나무가 아직도 그곳을 지키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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