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21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운수 좋은 날

by pahadi Feb 08. 2025

  태블릿의 강화 유리 필름이 깨졌다. 다행히 액정은 무사했다. 새 보호 필름을 사려고 인터넷을 뒤지는데 구식 모델이라 재고처리인 듯 아주 저렴했다. 대한민국의 놀라운 택배 시스템 덕분에 다음날 곧장 새 보호필름을 받았다. 깨진 보호 필름을 살살 걷어내고 온 신경을 집중해 새 보호 필름을 붙였다. 전문가가 붙인 것처럼 기포 하나 없이 완벽하게 잘 붙었다. 세트로 구매한 새 보호 필름이 한 장 더 남았으니 혹시나 만나게 될 다음 불운도 걱정 없다. 마음이 흐뭇하고 든든하다.


  깨진 유리필름을 조심히 들어 쓰레기통에 버린다. ‘꽤 날카로운걸.’ 누군가 다칠 수도 있겠다 싶어 더 잘 싸서 버리려는데 진부한 일이 벌어졌다. 그 누군가가 내가 되다니.

  “아야야야! “


  벌어진 틈 사이로 빨간 핏방울이 맺히더니 이내 뚝뚝 떨어졌다. 아이들 때문에 몇 번 봉합하러 병원에 다닌 적이 있어 어느 정도 감이 왔다. 예사 상처가 아니다. 봉합해야 할 것 같다! 신속 정확한 선택에 박수를 보낸다. 이래서 경험이 중요하다니까. 역시나 쓸모없는 경험은 없는 거다.


  아이들의 하원시간이 다가오고 있으니 빠른 결정 다음에 재빠른 행동이 필요했다. 손수건으로 상처를 칭칭 감고 휴대전화를 챙겨 외투만 걸친 채 서둘러 나왔다. 휴대전화 앱으로 택시를 부르고, 결제를 하고, 모바일 건강보험증까지 확인가능하니 이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시대의 축복을 온몸으로 누렸다


  접수를 하고 대기석에 앉으니 이제야 한숨 돌릴 여유가 생겼다. 찬찬히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 낯설지는 않았지만 내가 환자로 온 건 처음이었다. “수지접합부”라는 글씨가 어느 때보다 커다래 보였다. 얼마나 무시무시한 단어인가. 손전체에 붕대를 칭칭 감은 사람, 얼굴 한쪽 가득히 반창고를 붙인 사람과 함께 대기석에 나란히 앉아 있자니 내 작은 손가락의 자그마한 상처가 한없이 별거 아니게 느껴졌다. 괜히 왔나 싶을 때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간단히 사고 경위에 대답하고 손가락 상처를 보여드리자 대번에 봉합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겁쟁이에 엄살쟁이라 참 다행이다. 그냥 참았다면 어쩔 뻔했나.


  봉합을 위해 간호사가 건넨 종이를 들고 응급실로 향했다. 벌써 네 번째다. 우리 아이들을 예쁘게 꿰매 주신 고마운 의사 선생님의 얼굴을 기대하며 응급실에 들어섰는데 웬걸 낯선 얼굴들 뿐이었다. 응급실에 풋내와 열정이 가득한 걸 보니 새로운 인턴 선생님들이 오셨나 보다.


  손가락에 남은 유리조각을 확인하기 위해 엑스레이부터 찍었다. “임산부 출입금지”라는 빨간색 글씨가 엑스레이실 앞에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임산부가 아니라 참 다행이었. 손가락은 인대와 피부가 매우 가까워서 인대가 쉽게  다칠 수 있는 부위라고 다. '수술을 하고 입원을 하면 좀 쉴 수 있을까’하는 철없는 생각 위로 두 아이의 얼굴이 풍선처럼 두둥실 떠올랐다. ‘수술은 절대 안 돼.'


  인대 손상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손가락을 끝을 바짝 감아 조였다. 이렇게 피가 안 통해도 괜찮을까 싶게 피를 안 통하게 한 뒤 하얗게 질린 손가락에 식염수로 추청 되는 액체를 끊임없이 들이부었다. 상처보다 이 순간이 더 아팠다. 꼼꼼하게 심혈을 기울이는 초보 의사 선생님께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참았으니 기어코 신음소리가 기어 나왔다.

  "이게 좀 아파요."

  라는 위로가 조금 늦게 청각 세포를 자극했다. 얼마 만에 소리 높여 "엄마"를 찾았던지. 그리운 동심으로 참으로 가까운 곳에 있었구나.


  손가락이 잘리는 건 아닐까 걱정이 드는 찰나 인대는 무사하다는 담담하고 믿음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1%의 가능성을 남겨 두기는 했지만 그건 나중일이니까. 다행이다. 제 시간 안에 집에 갈 수 있겠다.

  다음은 상처를 봉합할 차례다. 칭칭 동여 메었던 이 느슨해졌지만 손가락 감각은 여전히 무뎠다. 덕분에 마취 주사 맞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태였다. 차마 시술 중인 오른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못했다. 보면 더 아프다는 걸 아주 잘 아는 지혜로운 어른이니까. 고개를 한껏 돌리고 있는 것의 단점이라면 언제 뾰족한 주삿바늘에 내 살을 뚫릴지 몰라 긴장감이 고조된다는 것쯤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게 바로 ‘도파민’이다! 서툰 손놀림으로 서둘러 휴대전화를 꺼냈다. 성급히, 황급히 인스타 앱을 누르고 마구잡이로 릴스를 틀었다. 최선을 다해 릴스에 집중하려는 그 순간, 주사 바늘이 내 손가락 피부를 사정없이 비집고 들어갔다. 신속하게 병원에 온 것과 봉합할 때 인스타 릴스를 본 것을 이번 주 최고의 선택으로 꼽아야겠다. 릴스 덕분에 지성인으로서 주사를 맞을 수 있었으니까.


  마취주사 덕분에 내 오른손 근처에서 무언가 일어나고 있지만 그것에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행복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오오 마취제여. 오늘 MVP는 당신입니다.' 내가 착하게 산 덕분에 이런 복을 받는 건가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기에 딱 좋은 긴장감이 유지되었다. 정성껏 봉합해 주신 손가락에 반창고까지 붙여주셨다. 그 배려에 내 손가락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더욱 알 수 없게 되어 참 다행이었다. 시치미 떼듯 살색 반창고를 붙인 손가락을 두 시간 전처럼 잘 움직였다. 이제 다 끝났다는 안도감이 밀려오기도 전에 마지막 불호령이 떨어졌다.

  "파상풍 주사를 맞고 가셔야 해요."

  또 주사라니요. 그래도 좋게 좋게 생각해야지. 한번 맞으면 5년간 유효하다고 하니 유비무환이지. 암암.


  파상풍 주사까지 맞고 나니 아이 하원시간이 아주 가까워졌다. 미션 성공이 코앞이다. 서둘러 수납을 하러 갔다. 잠깐의 실수로 여만 원 지출되었다. 주말에 살까 말까 하다 안 산 옷을 떠올렸다. ‘안 사길 잘했지.’ 잠깐 입을 옷에 쓸 돈을 평생 쓸 손가락에 써야지. 과거의 나. 참 잘했다. 이 모든 게 짜인 각본처럼 어쩜 이리 딱딱 맞는담?

이 생생한 키데이가 벌써 이틀 전이다. 오늘은 소독하러 가는 날이다. 몇 땀을 꿰맸는지, 상처는 잘 낫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반창고를 떼지 않고 잘 견뎠다. 내가 이렇게 인내심 있는 사람이라니까요? 상처에 물이 닿지 않게 조심하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외치며 집안일 면제권을 보너스로 얻었다.


  접수를 하고 대기석에 앉았다. 명절 전이라 그런지 환자가 꽤 많았다. 대기시간이 길어진 덕분에 강제 독서 시간이 이어졌다. 손가락은 좀 아프지만 전보다 똑똑한 사람이 되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똑똑 노크를 하고 진료실에 들어갔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우리 아이들을 예쁘게 꿰매 주셨던 응급실 선생님이다. 이제 레지던트가 되셔서 응급실이 아닌 진료실에서 근무하시나 보다. 나는 내향인이니까 티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내적 반가움에 축하를 더했다. ‘그동안 응급실에서 고생 참 많으셨어요. 축하드려요!’ 누군가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다니 영광이다. 앞으로 더 승승장구하시는 의사 선생님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안 보면 더욱 좋고요.


  간단한 소독을 마치고 인대는 앞으로도 괜찮을 것 같다는 100%에 가까운 덕담을 듣고 진료실을 나왔다. 만원 중반을 수납했다. 은 비용은 아니지만 그래도 큰 부담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아플 때 치료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 감사하다. 아이들이 아닌 내가 다쳐서 다행이고, 이 정도로만 다쳐서 다행이고. 참으로 운수 좋은 날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플렉스 해야지. 맛있는 거 먹자!


  차가운 바람이 쌩쌩 불어 잠깐 흔들리기는 했지만 애매한 버스노선 덕분에 어차피 걸어야 해서 우리 동네 맛집 쌀국수 가게에 무사히 도착했다. 나는 환자니까. 피를 많이 흘렸으니까. 영양보충이 필요하니까. 고기 듬뿍 감자말이새우까지 곁들여 먹는 호사를 누려야겠다. 추위 덕분에 대기도 없으니 이건 완전 키비키잖아.


  뜨끈뜨끈한 쌀국수와 고소한 감자말이 새우를 기다리며 분주한 주방을 구경한다. 통조림에 든 진득한 소스를 통에 옮기기 위해 통조림에 구멍을 내고 뒤집어 통에 받쳐두었다. 얇고 긴 틈으로 눅진한 소스가 얼마간의 시간 간격을 두고 차분히 뚜우욱, 우욱 중력을 거스르듯 천천히 떨어진다. 바쁜 주방에서 유일하게 여유로운 시간이 흐른다.


  그래. 급할 거  없지. 괜히 소스를 빨리 떠내려고 통조림을 무리해서 열다 다칠 수도 있어. 숟가락으로 열심히 퍼내봐야 팔만 아프고 설거지거리만 생기지. 가만히 기다려도 언젠가 소스는 다 떨어질 것이고 내 손가락도 곧 나을 것이고 지금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문제들도 과거가 될 터인데. 서두를 건 하나도 없다.

  “맛있게 드십시오.”

고파서인지, 추워서인지 흔하디 흔한 말이 오늘따라 더 다정하게 들린다.

  고기와 숙주가 듬뿍 올라간 쌀국수가 김을 모락모락 풍긴다. 천천히 먹어야지. 이 순간을 눅진하게 음미하며. 커다란 불행을 피해 오늘도 제 역할을 해주는 손가락들을 찬미하며.

“아- 맛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새해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