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이야기는 언제나 가까이

by pahadi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이 무엇인가요?


시대가 변해 TV보다 유튜브나 OTT가 대세가 되어도 나의 최애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고 있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언제부터 보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인간극장>을 보며 등교 준비했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나는 걸 보니 꽤 오래되긴 했다. 아빠와 함께 즐겨보던 프로그램을 이제는 남편, 아이들과 함께 본다.

평범한 이웃의 삶을 담은 휴먼다큐멘터리 <인간극장>은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어디 갓 지은 뜨끈한 밥이 질릴 때가 있나. 우리 동네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 같은 주인공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명 한 명이 삶의 기술자이자 철학자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이나 기가 막힌 반전은 없어도 최선을 다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사람들. 친근한 희로애락이 있어 눈이 가고 마음이 가는 따뜻한 이야기들.

이번 주인공은 자연과 더불어 농사지으며 자급자족하는 생태영성의 삶을 실천하고 있는 수녀님들이다. 땅의 온기를 느끼고 미생물의 고마움을 새기며 살아가는 수녀님들의 얼굴에는 천진난만함이 가득하다. 검은 수녀복, 희끗희끗한 흰머리와는 다소 생경해 보이는 아이 같은 웃음이 자꾸 마음을 간지럽혔다. 아, 나도 저렇게 웃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녀님들의 시간은 바쁘게 흘러간다. 매일 새벽 기도를 드리고 나면 수녀복을 벗고 자연인이자 농부의 생활을 시작한다. 언 땅 속 남은 고구마를 수확하고 닭장에 왕겨를 깔고 산에 밥을 묻어 미생물을 기른다. 성탄절과 월동준비까지 겹치니 할 일은 몇 곱절로 늘어나고 일손은 부족하기만 하다. 분주한 수녀원의 시간 속에 잠시 소홀한 틈을 타 작은 소란이 생겼다.

수녀원을 책임지고 있는 가르멜 수녀님이 곰팡이가 핀 수세미를 골라내고 있는 선배 안젤리까 수녀님에게 말했다.

“다 제 탓이에요.”

정성껏 기르고 손질해 말려둔 수세미를 살뜰하게 돌보지 않아 곰팡이가 핀 것이다. 가르멜 수녀님은 수세미를 준비하느라 애쓴 안젤리까 수녀님의 노고를 잘 알기에 미안해 어쩔 줄 모르며 자신을 탓했다. 수녀원에서 가장 바쁜 가르멜 수녀님, 시키기보다 항상 먼저 발 벗고 나서느라 더욱 바쁜 가르멜 수녀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안젤리까 수녀님은 부드럽고 단호하게 답했다.

“자기 탓이라고 하고, 자기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면 안 돼.”

아, 이 얼마나 빈틈없이 딱 맞는 퍼즐처럼 완벽한 대화인가. 서로 얼마나 애썼는지 알기에, 누군가의 안녕을 진심으로 바라기에 완성된 대화. ‘다 내 탓’이라는 겸손한 말에 상투적인 ‘괜찮아’ 대신 건네는 ‘자신을 그런 사람으로 만들지 말라는’ 다정한 조언. 스스로를 챙기고 아끼라는 염려와 애정이 듬뿍 담긴 말. 그런 말들은 스쳐 지나가도 잊히지 않는다. 닳으면 닳을수록 부드러워지는 포근한 이불처럼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하찮은 이유를 대며 다른 이를 탓하지는 않았는지. 스스로를 쉽게 깎아내리지는 않았는지. 함께 살아가는 모두에게 친절하였는지 되돌아본다. 중요한 이야기는 언제나 가까이 있다. 내 안에, 네 안에 그리고 우리 사이에. 작은 실천으로 '죄송한데요'로 시작하는 말보다 '감사합니다'로 끝나는 말을 자주 하자고 다짐한다.

마음에 온기가 퍼져나간다. 이래서 내가 <인간극장>을 못 끊는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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