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교수, 미래학자. 후안 엔리케스
자신이 갖게 될 재능과 사회적 지위가 무엇인지 전혀 모른 채 무작정 태어난다면, 당신은 어떤 사회에 태어나고 싶은가?
하버드 교수인 미래학자 후안 엔리케스가 쓴 책으로, 노예제도, 난민, 전쟁 등과 같이 역사적으로 과거에 있었던 사건과 가짜 뉴스, 인공지능, 일회용품, 교육 등 기술 발전으로 이미 현재를 바꾸고 있거나 미래에 가져올 변화 등을 포함해서, 다양한 윤리 주제를 바라보는 기준이 어떻게 달라져 왔는지 얘기하고, 미래에 생겨난 사회 문화적인 변화를 예상하며 앞으로는 윤리의 기준이 어떻게 달라지게 될지 여러가지 화두를 던지고 있다.
오늘날의 보편적 규범에 따라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라 해도 미래의 어떤 시점에 가서는 그 행동 때문에 가혹한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미래 세대가 어떤 것들을 윤리적이라 여기고 어떤 것들을 야만적이라 여길지 우리는 추측만 할 뿐 확실히 알 수 없다. (중략)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우리에겐 과거보다 더 많은 선택지와 더 높은 수준의 자유가 주어진다. 그리고 이런 폭넓은 선택권 덕에 우리는 조상들의 과거 행동을 비판하기도 한다.
- <들어가며> 중에서
일단 신기술들이 세상에 통용되면, 그것은 과거에 존재하면 두려움을 누그러뜨리고 우리가 윤리적 혹은 비윤리적이라 여기는 것들을 매우 빠른 속도로 바꾸어놓는다. 두 개의 ‘P’, 즉 피임약(pill)과 페니실린(penicillin)은 한 세대에게 성적 자유를 제공했다. 이 두 ’P’ 덕분에 사람들은 오랜 역사 속에서 공포에 떨었던 임신과 매독, 임질로부터 해방되었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남녀에게는 섹스를 즐기는 일이 갑자기 용인되었고, 평생에 걸쳐 만나는 섹스 파트너의 수 또한 놀라울 정도로 늘어났다.
- <1장 인간을 다시 설계하는 것은 옳은가> 중에서
그 어느 때보다 기술이 빠르게 사회를 휩쓸면서, 이 파도에 밀려난 이들은 기술을 반대하는 활동가들과 연합하여 정치 스펙트럼 전 영역에서 위세를 키워가고 있다. 좋았던 과거 그 시절로 되돌아가길 원하는 트럼프의 MAGA 종족부터 좌파 진영의 백신 거부자와 우익과 좌익의 브렉시트 지지자, 과학에 반대하는 활동가, 세계화에 반대하는 사람, 현대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온갖 영역에는 허위의 공동 목적이 존재한다. 그들 모두는 자신이 지금보다 많은 통제권과 자율성을 가졌던 시절, 그래서 지금보다 ‘더 나았던 시절’이라고 스스로 평가하는 과거로 돌아가길 원한다. (중략) 카리브해나 중앙아메리카의 12개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1년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 그러나 이 나라들 중 그 어떤 곳에서든 변호사, 운전사, 관료, 요리사, 교사, 회사원, 농부, 기계공 등이 창출해낸 부의 총합이 왓츠앱 직원 수십 명이 창출한 부에 미치지 못했다 기술은 소득불평등과 관련된 규칙을 바꾸어놓았고, 그 어떤 폭군이 꿈꾸었던 것보다 효과적인 방법으로 부를 창출한다. 폭군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대상은 국민 뿐이지만 기술은 전 세계를 향해 열려 있기 때문이다.
- <2장 기술이 윤리를 바꾸는 것은 옳은가> 중에서
경제가 발전해서 분명 전세계적으로 모두가 전보다 더 잘 살게 된 것은 맞지만, 자유시장경제는 부의 편중화를 극대화하여 소수에게 발전의 부가 집중되면서 오히려 대다수가 경제 발전의 성과에서 소외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소외된 사람들이 내가 속한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표출하는 배척과 분노가 지구상에 만연하게 된 것은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정신병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사이코패스와, 사회 발전에서 소외되어 분노를 터뜨리는 사람들은, 문제를 야기한 원인이 스스로의 주체적인 잘못이 아닌 점에서 동일하다. 저자는 우리 사회는 이를 어떤 방식으로 극복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미래의 윤리학자들은 너무도 당연하게 다음과 같이 물을 것이다.
“억만장자 2047명은 전 세계 극빈층의 가난을 한 번도 아니고 일곱 번이나 끝낼 수 있었을 텐데 무슨 이유로 그렇게 하지 않은 걸까? 어린이를 위한 학교 무료 급식과 가난한 어린리를 위한 기초 의료 서비스는 중단하면서도 0.1퍼센트의 부자들에겐 엄청난 세금을 감면해주고 미국 정부의 재정 적자 규모를 높이는 것이 정말 좋은 발상이었을까?”
생산성을 높이면 높일수록 우리는 이전 세대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다. 가장 힘없는 시민에게 최소한의 자원도 제공하지 않는 지금의 우리 사회를 미래 세대는 윤리적으로 문제 있는 사회라 평가하지 않을까? (중략) 우리가 취한 행동들은 보고 나면 미래 세대는 우리를 어떻게 평가할까? 미성년자에게 노동을 시켰던 과거 사람들에 대해 지금 우리가 내리는 평가와 똑같지 않을까?
- <2장 기술이 윤리를 바꾸는 것은 옳은가> 중에서
그리고 부의 편중이 점점 심해지기만 해도 이를 해결하지 않는 현 새대의 책임 또한 묻고 있는 것이다.
기술 덕분에 우리가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또 입증하는 일이 빠르게 이뤄지자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정보에 훨씬 더 빨리 접근할 수 있고 또 교차확인 능력이 한층 커지면 터무니없는 가짜 지식이나 뉴스는 엄청난 압박을 받을거야” 그러나 그런 착각이었다. 오히려 의도적인 허위정보와 거짓말이 우리를 홍수처럼 덮고 있으니까.
(중략) 분노와 공포가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SNS와 인터넷 게시글, 신뢰할 수 없는 '뉴스'에 의지한다. 이런 플랫폼의 대부분은 구독료가 아닌 광고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므로, 플랫폼 사용자들의 몰입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수익 역시 늘어난다. 특정 대상을 비난할수록 조회 수과 '좋아요' 수가 계속 증가하기 때문에 굳이 상대에 대한 비난 강도를 낮출 이유는 전혀 없다. 이렇게 해서 이쪽의 비난은 저쪽의 맞비난을 낳고, 그에 따라 다시 또 이쪽의 비난이 이어진다. 즉, 분노는 트래픽(접속량)을 높이고 수익은 그와 비례하여 늘어난다. 이런 구조 속에서 극좌와 극우는 점점 관대함을 잃고 '저쪽 사람들'을 비난하는 내용이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믿으려 든다.
- <2장 기술이 윤리를 바꾸는 것은 옳은가> 중에서
영국이 노예지도를 가장 먼저 폐지한 국가라는 사실은 그저 우연일까? 다른 나라들보다 일찍 산업화를 거쳤고 노예무역으로 직접적 수혜를 받지 않았담는 점이 어쩌면 영국의 노예제 폐지와 관계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미 산업화를 이룬 미국 북부가 노예제도를 금지한 데 반해 농업에 의존했던 남부의 경우 그 끔찍한 관행을 유지하기 위해 싸웠다는 건 그리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역사와 문화를 초월해 많은 이가 인간이 인간을 소유해도 괜찮다고 자신을 설득시켰다. 그런데 그렇게 수천 년간 지속되어온 사악한 관행이 왜 갑자기 산업혁명 직후에 사라지기 시작한 걸까?
- <3장 어제의 세계는 지금도 옳은가> 중에서
무엇이 옳은가 에 대한 변하지 않는 답은 없다.
윤리 수업은 항상 지루하고 사람들은 각자가 옳고 그름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은 사회를 변화시키고 사람들을 계몽하고 윤리에 대한 판단 기준도 변화시킨다. 노예제도가 폐지되듯, 여성에게 참정권이 생기듯, 동성애가 병이 아닌 것으로 인정받듯, 일회용품의 사용과 탄소배출에 문제의식을 갖듯.
1970년에 소득 면에서 상위 50퍼센트에 속한 이들은 나머지 사람들에 비해 기대수명이 1.2년 더 길었다. 그러나 2000년에 이 격차는 5.8년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지금은 … “소득 분배상 상위 1퍼센트의 사람들은 하위 1퍼센트의 사람들보다 15년 더 오래 살 것으로 예상된다.”
- <5장 지금의 사회구조 시스템은 옳은가> 중에서
운전자가 직접 모는 자동차는 해마다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자율주행 자동차가 일반자동차보다 2배 안전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혹은 5배? 아니면 10배? (중략) 자율주행 자동차의 운전 실력이 설령 평균적인 일반 운전자보다 나아진다 해도 그때가 되면 더 많은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또 가능한 한 모든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당신은 해마다 이 결정을 연기할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보다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될 테고.
- <6장 당신의 '옳음'은 모두 틀렸다> 중에서
올바름을 판단할 때 필요한 것. 수수함, 관대함, 공감, 공손함, 겸손함, 연민, 예의 바름, 진실함. 이 책에서 나열한 윤리의 판단 핵심원리이다.
어떤 것도 영원히 옳고 그르다고 장담할 수 없으니 무엇이 옳은지 말하기 전에 나와 내 앞의 사람에게 겸손하고 다정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