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함의 잔해

30대 엄마의 성장기

by 노지윤


나는 드라마를 즐겨 보는 편은 아니지만, 이따금씩 머릿속에 각인되는 몇 장면들이 있다. 아주 오래된 드라마 중, 2006년에 방영된 연애시대라는 작품이 있었다. 극 중 손예진과 감우성이 부부로 나오고 아이의 죽음으로 인해 이혼까지 가지만, 그 안에서 각자가 느끼는 감정과 여러 생각들이 교차하며 벌어지는 섬세한 작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그때 17살밖에 되지 않아서 자세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이 장면만큼은 눈빛, 손짓, 숨소리, 애절한 목소리까지 하나하나가 공감되었다.


손예진이 아이의 죽음으로 인한 상처로 겨우겨우 삶을 살아가다가 집에 도착해 저녁을 차려 먹으려 피클을 따는 장면이었다. 피클 뚜껑이 잘 열리지 않자,


"왜 이것조차 내 맘대로 되질 않아"


라며 울며 소리치고 바닥에 던져 버렸다. 결국 주변에 있던 여동생이 그 유리병 조각에 다쳐 작은 상처를 입는 내용이다.


분명 다친 건 여동생인데, 어찌나 손예진이 가여워 보였던지. 아직도 가끔은 그 장면의 진동이 울리는 듯하다.


왜인지 그냥 일상을 사는데 나도 모르게 어쩐지 더 날이 서고 억울하고, 저 사람의 모든 행동과 말투, 심지어 눈빛과 그전에 행동했던 모든 것들이 상기되면서, 따지지 않는 피클처럼 내동댕이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올라올 때가 있다.


무엇이 문제인지 딱히 꼬집지 못하겠지만, 어딘가 억울하고 어쩐지 속상하고 괜스레 화가 나는 나의 시기는, 가만히 들여다보면 과거의 억울함의 잔해들인 경우가 많다.


그때 왜 나에게 당신은 그랬어야만 했는지, 나는 왜 한마디도 하지 못했는지,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떻게 하겠는지 같은 생각들. 들추기만 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만큼 속이 뭉개지는 억울함의 기억들이, 무엇 때문인지 피클 유리병의 파편처럼 자꾸만 오늘의 나의 하루에도 찔림이 되어 돌아올 때가 있다.


그럴 때, 이런 내가 다시 발견될 때면 조금 어린 나는 초라한 동굴 속에 숨어버리곤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듦에 따라 나를 마주하며 마음껏 슬퍼했다가, 억울해했다가, 이제는 정리하고 매듭을 짓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시기와 때가 있음을 알기에, 그 억울함의 잔해가 준 찔림과 상처들조차 나의 귀한 발자국과 눈물 자국이 되어 결국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준 지표였음을 이제는 천천히 삼키며 소화하고 싶다.


억울함, 수치심, 부끄러움, 어리석음, 미성숙함, 유치함등의 기억들까지도 이제는 정말 포용해야 할 때가 왔다. 쉽지 않지만, 같이 가자.


그리고 이제 제발 좀 자유해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