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9일의 기록
오늘은 거창에서 보내는 둘째, 아니 셋째날이다. 지금은 벗과 함께 얼굴에 팩을 붙이고 하루를 마감하는 일기를 쓰고 있다. 방금은 다리 옆으로 노래기가 지나가서 가볍게 처치하고 다시 일기로 돌아온다. 만약 내가 불교 신자였더라면 어제 오늘 아주 큰 죄를 몰아 지은 셈이다. 기독교인인 것에 감사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분명히 일찍 일어나겠다고 결심했는데 결국 8시 넘어 일어났다. 밤새도록 방바닥이 너무 뜨거워서 뜨거운 숨을 내쉬며 잠을 잤다. 선풍기도 틀어보았지만 소용이 없어 새벽에 일어나 에어컨을 틀고 다시 잠에 들었다. 그 여파였는지 8시까지도 약간 찌뿌둥한 상태였다. 우리를 깨운 것은 아침 여덟시 반의 중규형이었다.
멀리서 다가오는 차 소리에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문을 조금 여시고 어이 일하러 가자고 말씀하셔서 부리나케 일어나서 씻고 나갈 준비를 했다. 오래 전에 일어난 듯한 멀쩡한 목소리도 장착했다. 저는 자고 있지 않았습니다. 아까 일어났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기적인 밍기적을 시전하고 있었습니다. 길게 말하고 싶었는데 뇌가 덜 깨서 아~아직 안 자요! 라고 말해버렸다. 안 잔다는 의사는 표명했으니 되었다.
아침에는 비가 오지 않아 밭으로 나가 풀을 벴다. 까슬하고 커다란 단풍잎같은 잡초였는데 매우 끈질겼다. 다행인건지 낫으로 잘 베어지고, 빨간 뿌리만 자르면 나머지는 부서지듯 시드는 친구였다. 중규형은 농사 처음 시작하실 때 이 녀석 때문에 한살림 그만 두고 싶었다고 말씀하셨다. 두 줄 정도 하고 나니 한살림의 'ㅎ'도 시작하지 않은 나마저 고개를 주억거리게 됐다. 이 일을 계속해서 반복하다보면 효율이나 편리와 닿아있는 것으로 마음이 기울지 않을까. 그럼에도 어떤 이유에서든지 오늘까지 무언가를 지키며 사과 나무를 가꾸시는 중규형과 다른 생산자분들이 새삼 대단해보였다.
점심에는 중규형표 떡볶이로 든든하게 식사했다. 올 타임 베스트 중규형 떡볶이. 사실 몇 타임 안 먹어 봐서 이렇게 말하는 게 좀 과장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은 진실이다. 아마 내일 먹어도 동일하게 맛있지 않을까. 모든 것의 조화가 완벽한 양념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아 지금 생각하니까 또 먹고 싶다. 작년에는 김말이도 해주셨는데 그것도 왕 맛있었다. 증인으로 작년 거창에 동행했던 벗들 아홉을 세우겠다. 그들 모두 나와 같은 의견일 것이다.
낮잠을 슬쩍 자려다가 읽어야 하는 책을 조금 읽고 읽고 싶은 책도 조금 읽었다. 3시 즈음에는 비가 와서 데크로 나가 내리는 물을 구경하면서 책 한 권을 완독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의 모양새가 멋졌다. 비가 살짝 멎으면 파란 하늘이 회색빛 구름 사이로 비쳤다. '멋짐'이나 '아름다움'같은 형용사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편이 더 좋다고 배웠다. 그때 조금 더 열심히 배워둘걸, 더 많은 단어를 알아둘걸. 이 풍경을 그려내기에는 나의 단어 목록이 너무나 빈곤할 따름이다.
또 다시 든든하게 저녁을 먹었다. 바질페스토 파스타에 볶은 버섯을 곁들였다. 이 역시 맛이 좋았다. 배가 불러 벗과 함께 어제와는 다른 길로 조금 걸었다. 층층이 나 있는 논밭을 산이 둘러싸고 있었다. 초록 안에도 이리 다양한 색과 모양이 있다는 걸 알았다. 7월의 논이 내뿜는 초록빛과 고르게 심어진 고추의 초록빛, 그 너머 여러 폭으로 겹쳐진 나무의 초록빛은 모두 다르지만, 어느 것 하나 튀지 않는다. 모두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비가 와서 산 중턱에 걸쳐 있는 안개도 오늘의 풍경을 장식하는 자연의 레이어. 여러 번 감탄했지만 내일 다시 보아도 동일하게 감탄하게 될 것 같다.
새로 찾은 길에는 스카이 라이프 쟁반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서 블로그 글도 올릴 수 있었다. 우리가 머무는 곳에는 통신이 잘 되지 않아서 어제 치 글도 올릴 수가 없었다. 고작 사진 다섯 장 때문이었다. 서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통신 상태인데 이마저 그러려니 한다. 이런 게 바로 거창 생활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프로젝트 회의도 살뜰하게 마치고 혼란스러운 민수의 선율에 맞추어 어깨를 들썩이며 춤 췄다. 댄스가수 민수표 안무의 핵심은 절제된 척추 움직임이므로 허리 마디마디에 심혈을 기울여 몸을 흔들었다. 운동 효과가 좀 있는 것 같다고 벗과 함께 웃었다. 나의 보호자와 통화하고 난 뒤엔 아까 읽은 책 일부를 필사했다. 거창에 오기 전에 급히 산 리필용 용지에 만년필로 책을 옮기고 있자니 A5 사이즈 바인더를 사서 필사 노트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샘솟았다.
책을 읽을 때에는 필사하고 싶은 것을 찾아가며 읽는 편이다. 선물하고 싶은 나의 벗들도 함께 떠오른다. 책을 읽는 것보다는 책을 사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고, 활자 읽기도 즐겨하지 않는 편이다. 그럼에도 책을 여는 건 광산에서 보석을 찾듯 나의 벗들에게 선물할 수 있는 문장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덕분이다. 필사를 그만 둘 시점은 오타가 생겼을 때. 한 자를 틀리면 계속해서 틀리게 된다. 집중력이 흩어졌다는 신호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틀린 종이는 접어둔다. 그리고 어느 날 새로운 종이에 같은 대목을 다시 쓰기 시작한다. 내일이 될 지 모레가 될 지 알 수 없다.
접힌 종이와 함께 이제는 하루를 마감할 때다. 내일은 꼭 일찍 일어나리라 다짐했다. 우리가 말하는 내일이 7월 8일의 아침이 분명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