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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연 Sep 18. 2021

최병소: 삶과 작업의 진실한 합일

실험미술을 뿌리로 단색화의 사상이 공존하는 최병소 고유의 예술

검은 물질을 마주하다,

숨이.

잠시 멈춰져, 다시 내뱉어지는 지리멸렬한 아픔에 검디검은 유골이 흩뿌려 날아간다.  


최병소의 대표작인 신문지 작업, <무제>를 처음 맞닥뜨린 심상(心想)이었다. <무제>는 신문에 인쇄된 글씨와 형상을 펜과 연필로 지워나가는 작가의 노동집약적 행위가 드러난 결과물이다. 신문 위에 빽빽이 그어진 볼펜 선 위로 연필심이 다시 덮어진다. 얇아지고 군데군데 갈라져 찢긴 형상은 더 이상 신문이 아니다. 특정 지어 부를 수 없는 이 물질은 천장에 매달리기도 하고, 바닥에 깔리기도 하며 때로는 재처럼 떨어진 조각의 한 파편을 집어 올려 전시장 흰 벽면에 꽂아 두기도 한다. 신문이라는 시대적 산물은 최병소의 끝없는 수행적 선 긋기 작업을 통해 촉각적이고도 탈세속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전혀 다른 무언가로 재탄생하게 된다. 과연 이 작업을 무엇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인가.

Installation View @The Armory Show, Courtesy CHOI Byungso, and Arario Gallery.


최병소를 만나러 가는 기차 안에서 S와 나는 조금 들떠 있었다. 상기된 마음을 가라앉히려 전시 기획서를 다듬다 조앤 기(Joan Kee) 저서의 『Contemporary Korean Art: Tansaekhwa and the Urgency of Method』를 뒤적거렸으나 텍스트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한국에 들어와 처음 맡은 전시는 1970년대 한국 현대미술이었다. 당시 제시카 모건(Jessica Morgan, 현재 Dia Art Foundation 디렉터)이 예술 총감독으로 지휘하는 광주비엔날레가 열리는 해였기 때문에 해외 주요 미술 관계자들의 한국 방문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한국의 갤러리들은 단색화 사조 작가들을 알리기 위한 전시를 발 빠르게 준비하고 있었고, 나 역시 그 흐름에 편승되어 대구행 기차에 올라타 있었다.


역에서 내려 작가의 작업실을 찾아가던 풍경은 전혀 기억에 없다. 다만, 불안정한 자세로 인사를 나눴던 최병소의 매캐한 첫인상만이 강렬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바스러져 재가되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검은 작업을 조심, 조심, 하나씩 꺼내와 우리는 까맣고 하얀 이야기를 시작했다.


신문의 글씨를 볼펜으로 지워나가는 과정에서 신문의 표면은 상처가 나듯 찢어지기도 한다.


1943년생인 최병소는 어린 시절 한국전쟁을 겪었다. 폭탄이 떨어지고 눈앞에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목격한 어린 날의 참혹한 기억은 지금까지도 그의 작업에 배경이 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가 서양화를 공부하던 대학 시절의 1970년대는 유신체제가 공포되던 시기로, 언론출판의 자유뿐 아니라 개인의 일상생활까지도 통제와 감시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미니스커트나 장발까지도 퇴폐 풍조로 불리던 시대가 아니었던가. 이러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한 명의 미약한 예술가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어떤 예술가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정신적으로 황폐해진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자연으로 회귀하려는 단색화 사조에 편승하였다. 그리고 또 어떤 예술가들은 시대의 권위와 관습에 저항하고(1968년, 국전(國展)의 부패를 비판하며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이 제2 한강교 아래서 ‘문화 고발장’을 불태우는 현실 고발성 퍼포먼스 등이 행해졌다.)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요한 예술 태도로 삼은 실험적이고 급진적인 미술을 이끌었다. 이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 지속되어 온 실험미술의 주축 그룹, AG(한국아방가르드협회)와 ST(공간과 시간)로 대변된다.


Untitled, 1975(Left),  Untitled, 1975(Right) Courtesy CHOI Byungso, and Arario Gallery


서울에서 대학을 마친 최병소는 고향인 대구로 내려가 ⟪한국 실험 작가전⟫(1974)과 ⟪대구 현대 미술제⟫(1974~1978)에 작품을 출품한다. 화병에 꽃을 꽂아둔 후 떨어진 꽃잎 몇 장을 분필로 표시해둔다던가, 특정 사진의 이미지를 가져와 단어를 나열하는 등의 작업은 지극히도 실험미술과 개념미술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75년에 시작한 신문지 작업 역시 실험미술에 근간을 두고 있지만, 단색화에 기인한 정신성과 촉각성, 행위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단색화조로도 읽힐 수 있다. 결국, 최병소의 작업은 1970년대, 양립할 수 없는 두 사조인 단색화와 실험미술 사이에 구축된 그만의 고유한 예술로 존재한다.


1960-70년대를 그려갔던 한국의 여러 단색화와 실험미술 작가들 중 왜 유독 최병소의 작업에 마음이 쓰이는지 오랜 시간 생각해봤다. 물론 한국에서 처음 기획한 전시의 작가(최병소는 이 전시 이후, 아라리오 갤러리 소속 작가가 되었다.)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단체전을 준비했기 때문에 최병소 말고도 단색화와 실험미술을 이끈 여러 작가들을 만났다는 점에서 그게 단 하나의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미술사적으로도 이유가 있겠다. 하지만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최병소의 작업이 그의 삶과 거짓 없이 일치한다는 점이었다. 그가 작업으로 사용하는 모든 재료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한 오브제다. 버려진 신문이나 잡지, 의자, 못쓰게 된 티켓, 책상에 굴러다니는 연필과 볼펜, 세탁소 옷걸이 등이 그 예이다. 이러한 소재를 선택한 데에는 분명 그가 처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이 있었을 것이고, 최병소는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예술을 해나갔다. 사실 말이 쉽지, 자신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지속적으로 해나간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런 점에서 최병소의 작업은 저릿한 감정 뒤편으로 올라오는 왠지 모를 위안과 평온이 있다.


미술사적으로는, 실험미술에 뿌리를 둔 단색화의 사상이 공존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작품 전반에 깔려있는 불교 철학 등 흥미로운 지점이 많다.(아직까지 최병소에 대한 연구와 논의는 부족한 상황이다.) 사실 서양 미술사에서 일상생활의 오브제를 사용해 작업을 해나간 예술가들은 많다. 하지만 최병소의 작업이 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예술가가 선택한 오브제가 단순히 '개념'으로서만 설명되는 것이 아닌, 작가의 무아지경에 이르는 반복적 행위를 통한 '물성'(촉각성) 자체를 바꾸는 힘에 있다. 최병소는 1970년대의 시대를 떠안고 있는 '신문'이라는 오브제를 선택했으며, 신문의 글씨를 지워나가는 행위(수행성, performance)를 통해 '전혀 다른 물질'을 탄생시켰다.


최병소는 이미 지나간 사조의 작가가 아니다. 현재 우리와 함께 고달픈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고, 그것을 거짓 없이 반영하며 여전히 예술의 실험을 거듭하는 젊은 작가이자 평범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가 앞으로 발표할 진실하고도 아름다운 작품을 손꼽아 기다리는 이유다.


"누더기가 될 때까지 하는 겁니다. 별 별 게 다 들어있어요. 이 안에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신문을 지우지만 사실은 신문을 지우면서 나를 지웁니다. 채우기인 동시에 비우기이며, 의미이지 무의미입니다." -최병소


https://www.youtube.com/watch?v=trLFUv4diDs&t=1s

최병소 인터뷰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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