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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연 Oct 02. 2021

노아 데이비스: 영원히 기억될 페인터  

빛나는 재능을 신이 시기해서일까. 천재라 불리는 예술가들 중 유독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 섬광(閃光) 같은 작품만으로 기억해야 하는 이들이 있다. 20세기 미술사에서는, 에곤 쉴레(Egon Schiele)와 밥 톰슨(Bob Thompson)이 스물여덟에 세상을 떠났으며, 에바 헤세(Eva Hesse)는 서른넷에, 장 미셀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는 스물일곱에 세상과 이별했다.

 

Noah Davis at work, Los Angeles, 2009. Courtesy The Estate of Noah Davis


21세기 미술사에서는 노아 데이비스(Noah Davis)의 이름이 그들 뒤를 따를 것이다. 1983년 시애틀에서 태어난 노아 데이비스는 서른두 살을 맞이한 해인 2015년 8월에 연부조직 육종(soft tissue sarcoma)이라는 희귀 암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하지만, 그에게는 20세기에 요절한 천재 예술가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21세기 예술가의 면모가 있는데, 그것은 미술계가 어떻게 특정 목소리와 관점에 특권을 부여하는지 이해하고, 예술가 개인이 미술계를 향해 직접적인 개입을 제시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의 아내이자 조각가인 캐론 데이비스(Karon Davis)와 함께 로스앤젤레스의 노동계층이 거주하는 알링턴 하이츠(Arlington Heights)에 세운 언더그라운드 뮤지엄(Underground Museum)으로 말할 수 있다. 32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약 400여 점의 회화와 콜라주, 조각 작품을 남겼으며, 예술이 가지고 있는 꿈과 사랑과 비전을 자신의 작품에, 동료들에게, 그리고 지역 사회에 뿌리고 갔다. 

 

노아 데이비스가 기획한 언더그라운드 뮤지엄의 첫 전시, "Imitaion of Wealth"를 MOCA에 옮긴 전시 전경 The Estate of MOCA


노아 데이비스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루벨 패밀리 컬렉션(Rubell Family Collection)에 그의 작품이 소장되어, ⟪30 Americans⟫ 전시에 최연소 나이로 초대되었다는 뉴스에서였다. 쏟아져 나오는 미술계의 가십과 뉴스들 속에서 그의 이름은 빠르게 잊혀졌고, 2018년 여름, 메튜 막스(Matthew Marks)와 그린 나프탈리(Green Naftali) 갤러리가 공동 기획한 ⟪Painting: Now and Forever⟫ 그룹전에서 그의 이름이 아닌 작품으로 우연히, 하지만 필연적으로 다시 만났다. 당시 나는 영상 작업을 하는 작가와의 줄다리기에 지칠 대로 지쳐 심적으로 너덜너덜 해진 상태였는데, 동시대 회화의 흐름을 맛볼 수 있었던 이 전시는 단비와 다를 바 없었다. 지금까지도 데이비스의 페인팅을 처음 마주한 순간을 생생히 기억한다. 흰 벽에 걸린 수많은 작품들 사이에서 조용히 그리고 부드러운 이야기를 걸어오는 한 쌍의 작품 앞에서 나는, 발을 뗄 수 없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깊은 교감에 전시가 내리기 전까지 수차례 그 작품만을 보기 위해 갤러리를 방문했었다. 지극히 구상적이면서도 추상적이고, 현실 속 한 장면을 그린 것 같으면서도 몽환적인 그의 회화에 나는 정확히 빠져버렸다.

 

Installation View, Courtesy The Estate of Noah Davis and David Zwirner


데이비스의 더 많은 작업을 직접 보고 싶었던 나의 간절한 염원은 2020년이 시작하는 1월에 이룰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예술가보다는 페인터로 생각되어 지길 바랬고, 그런 그를 대변해주듯 데이비드 즈워너(David Zwirner) 갤러리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은 헬렌 몰스워스(Helen Molesworth, 전 MOCA 수석 큐레이터)가 세심히 고른 27점의 회화가 주를 이루며 그의 꿈과 이상을 보여주는 언더그라운드 뮤지엄 또한 엿볼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데이비스의 느슨한 회화 속 인물들은 모두 흑인이며 평범한 일상생활이 소재가 되어 펼쳐진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마약과 총이 아무 상관없는 정상적인 시나리오에서 흑인을 보여주고 싶다”라고 말했다. 사실 그는 뉴욕의 명문 학교인 쿠퍼 유니언(The Cooper Union)을 다녔고(졸업을 일 년 남겨둔 채 LA로 떠났다.), 아버지는 저명한 변호사였으며, 형은 영화 제작자이자 비디오 아티스트로 유명한 카릴 조셉(Kahlil Joseph)이다. 남부러울 것 없는 배경을 가졌음에도, 그가 갖고 태어난 피부색 때문에 감내해야 했던 수많은 일들을 그가 돼보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그를 조금은 이해해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나 또한 그와 비슷한 시기에 보스턴에서 학교를 다니고 뉴욕에서 일을 하며 ‘동양인 여성’이라는 프레임으로 대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섞여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좌절감과 치욕적인 감정을 내내 끌어안고 버텨야 했다. 데이비스 회화 전반에 깔려있는 고독은 나의 개인적 감정을 대변해 주기도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흠모했던 (그리고, 나 또한 흠모하는) 마를렌 뒤마(Marlene Dumas)나 케리 제임스 마쉘(Kerry James Marshall), 뤽 투이만스(Luc Tuymans)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화면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예를 들어, 영혼이나 조상, 유령과 같은 초현실적 존재들이 불확실한 어조로 배치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마술적 사실주의나 초현실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Pueblo del Rio: Concerto, 2014(Left), Pueblo del Rio: Arabesque, 2014(Right)


나를 노아 데이비스의 열렬한 팬으로 이끌어 준 작품, <Pueblo del Rio: Concerto>(2014)와 <Pueblo del Rio: Arabesque>(2014)는 모더니스트 흑인 건축가로 알려진 폴 윌리암스(Paul Williams)가 1940년대 초 설계한 하우징 프로젝트가 배경으로 그려졌다. LA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공공 주택 프로젝트였던 푸에블로 델 리오(Pueblo del Rio)는 결국 빈곤과 갱단의 폭력 등으로 여러 차례 시달린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데이비스는 이 지역을 배경으로 그랜드 피아노를 연주하는 남성과 투투를 입은 6명의 발레 댄서를 슬레이트 바이올렛(slate-violet) 하늘 하래에 꿈처럼 그려 넣었다. 마치, 소외된 지역 사회에 예술을 전파시키고자 했던 그의 꿈이 깃든 그라운드 미술관처럼 말이다. 그는 예술의 선한 힘을 믿었던 이상주의자였다. 그렇기에 아프리카계 미국인 및 라틴계 노동 계급자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미술관 수준의 예술품을 전달 하고픈 꿈을 이루고자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유산 전부를 미술관을 세우는데 썼으며, 로스앤젤레스 현대 미술관(MOCA)의 작품을 빌려 전시를 꾸리기 위해 수석 큐레이터였던 몰스워스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으니 말이다.

 

그의 흔적을 쫓아 자료를 읽어가면서, 픽사 스튜디오가 제작한 애니메이션, ⟪코코(Coco)⟫(2017)가 생각났다. 죽음 후에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의 삶은 영원할 수 있다는 멕시코의 죽음에 대한 문화를 생각하며, 데이비스는 아직 우리와 영원히 함께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를 깊이 사랑했던 가족들과 미술계 동료들과 지역 이웃들이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를 영영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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