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살게 되잖아
삶이 잘 안 풀릴 때마다 사람들은 ‘나중에 잘 되려고 그런가 보다’ 같은 위로의 메시지를 건넨다. 미디어나 예술 작품에서도 역경을 딛고 일어난 존재들을 아름답게 비춘다. 오디션 프로그램 역시 도전자의 굴곡을 바탕으로 서사를 만들어 내고 대중들은 그 스토리에 열광한다. 온 세상이 개개인이 겪는 크고 작은 고통을 더 나은 삶으로 가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로 생각하는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 또한 고통이란 쓰레기 더미 속에서 무언가를 건지기 위해 허우적거렸다. 그 속에서 의미를 건져 올려 뼈대를 만들고 갈기갈기 찢어진 기억들을 모아 여기저기 붙였다. 대체 무엇을 만들고 싶었던 걸까? 이제 와서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진짜 중요한 건 ‘왜’다. 난 왜 온몸이 더러워지는 줄도 모르고 지난 고통들을 헤집고 다닌 걸까?
어쩌면 그렇게라도 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고통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조립하면서. 하지만 고통은 그냥 고통이다. 고통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고통은 그냥 고통이었고, 그 자체로 어떤 의미도 없다. 고통에 대한 생각이 어떤 의미를 만들 수는 있겠지만, 고통 자체는 정말로 제로, 0, 무無이다.*
고통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악취를 참고 쓰레기 더미를 뒤지던 내 행위를 뻘짓으로 만들었지만, 결국은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게 의미 붙이기 나름이니까. 가령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삶의 가치들은 누군가에게 별 거 아닐 수 있다. 그 반대도 성립된다. 추억이 깃든 물건을 오래 간직하는 사람들 또한 흔히 볼 수 있다. 별 거 아닌 물건 역시 누구에게는 무엇을 줘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는 법이다.
한동안 내 삶에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은 채 살았다. 고통스럽게 사는 게 지긋지긋하고 신물이 났다. 어느 순간 끊어질 관계에 내가 괜히 의미를 붙이는 것 같아서, 또다시 고통 속을 뒤져 나에게나 의미 있는 무언가를 만들 것 같아서. 자꾸만 인생에서 의미를 찾고 희망을 가지는 게 싫었다. 그게 다 뭐라고? 이런 얘기를 3주 정도 반복했을 때, 당시 날 상담하던 상담사는 내게 화를 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문자로 상담을 종결했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삶에도 고통은 찾아왔다. 바위산에 묶인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파먹는 독수리처럼, 고통은 집요하게 나를 괴롭혔다. 하루에 수십 번 열탕과 냉탕을 오갔다. 죽지 않을 만큼 고통스러운 날들이 반복됐다. 그냥 날 죽여, 죽이라고, 죽이란 말이야!
고통은 의미가 없단 말에 화를 냈던 상담사가 지금은 이해가 된다. 몸도 마음도 고통이 지나간 자리마다 흉터가 남으니까. 흉터가 곪고 썩어 들어가면 엄청 고통스러우니까. 그러니까 난 치료자 앞에서 치료를 거부하겠다는 말을 해온 셈이다. 병보다 치료하는 게 더 아프다는 이유로.
돌고 돌아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는 이유는 일종의 자가 치료라고 생각한다. 고통은 사람을 갉아먹고 의미는 사람을 살게 만드니까. 나 역시도 그동안 고통을 뒤지고 뻘짓을 하며 자가 치료를 해온 셈이다. 비록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피해 보상은 받지 못했지만, 의미를 찾아 무언가를 만들어 가면서 나는 조금씩 조금씩 살게 되었다.
그럼 무엇에 의미를 두며 살아야 할까? 어느 쪽에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웬만하면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을 전문가나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들과 함께 하길 바란다. 제 아무리 영특하고 똑똑한 사람일지라도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법이다.
* 이반지하,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