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ainBoulot Jan 24. 2019

일상적 사람 관계의 미덕들

'인성'이라는 단어에서 꼰대성을 소독하기


어떤 사람이 ‘사람이 되었다’ 혹은 ‘좋은 사람’이다 라고 표현할 때, 그것은 나와의 사회적인 상호작용 안에서 긍정적인 상대방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계약이나 조직관계에서 합의되거나 기대되는 바에 따른 “믿을만하다”, 혹은 기대보다 높은 성취를 낳는 특질인 “유능하다”와는 다르다. 또 어떤 윤리적 태도를 견지하는 "올곧다"도 아니다.


유능함의 경우는 근대 자본주의가, 더 좁혀 말하면 기업 입장에서 인재 관리를 위해 수많은 연구를 통해 세분하여 연구하고 정의되어 왔고, 윤리의 경우는 종교와 철학의 역사 속에서 사유되고 세련되어왔다. 그렇지만 일상적인 상호관계는 별로 사유되고 체계화되지 않은 듯하다. 그러다 보니, 사실 몇 가지 전혀 다른 미덕임에도 묶어서 ‘인성’이 어떻다고 판단하거나, 다양한 미덕 중 일부만으로 어떤 사람이 “사람이 좀 그래”라며 단언하곤 한다. 그러니 '인성'이라는 단어에 어마어마한 꼰대성이 도사리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사실, 유능함이나 윤리에 대해 사유하는 관념적인 사람들은, 이러한 일상적 사람 관계에 종종 어려움을 겪지만 그만큼 사유하고 싶은 관심은 두지 않는 듯하다. 바로 내가 그런 인간군에 속한다. 그렇지만 스스로의 외로움을 세상의 탓으로 돌릴 만큼 성취한 건 아닌지라, 자신의 사회성에 대해 이러저러한 건 부족하지만 이러저러한 건 그래도 괜찮아, 하면서 변명할 수 있는 수준만큼은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런 이유로, ‘인성’에 대해 한번 여러 개념으로 분류해 보았다. 딱히 체계적이진 않고, 정합적이지도 않으며, 모든 이름 붙임이 적합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이러한 분류가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자위하는 데 쓰이지 않고, 누군가를 꼰대처럼 판단하는 데 쓰이지 않고, 그저 스스로가 어제보다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일종의 스킬 트리로 활용하고자 하는 바람이다.



예의바름

예의는 그 당시 사람들이 규정한 특정 사회적 관계 내 TPO의 규범적 프랙티스다. 고도리의 룰처럼 사실 예절이라고 서로 생각하는 규범은 지역별로, 시대별로, 심지어 사람들마다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도, 어쨌든 모두가 그것을 객관적이고 보이지 않는 법전에 이미 규정된 내용들로 여긴다. 그러다 보니 이른바 ‘가정교육’이 이를 책임지는 것으로 간주하는데, 이는 내용 규정적인 것이니 그 내용을 가르쳐서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경우 바름

경우 바름은 예의바름과 달리 특정 내용이 정해져 있는, TPO마다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감정적이든 이해적이든 상호관계 전반에 있어 ‘균형’을 추구하며 실천하는 태도에 가깝다. 받았으면 주고, 챙겨주었으면 배려받는 것이다. 즉,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는 예의가 있다면, 경우 바른 윗사람이면 대우받는 만큼 아랫사람을 챙겨야 한다. 상호관계는 극히 다양하므로 규정된 내용을 지닐 수 없으니, 이에 대한 실천은 상황 내에서 상호관계와 관련된 공감능력을 기반으로 한다. 예의와 달리, ‘감’이기 때문에 하나하나를 ‘보고’ 자연스럽게 ‘익히는’ 수준의 교육이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듯하다.


착함

착함은 상대에게 상처 주거나 피해를 주지 않기를 희망하는 태도와 그에 따른 행동이다. 사람들의 욕망은 충돌하고 자원은 부족하기 때문에, 착한 행동은 종종 인내와 자기희생이 포함되곤 한다. 역시 공감능력이 없다면 이런 행동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경우 바름과 다르게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인 성격을 띠므로, 자기희생으로 인하여 때로 숭고한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다만 실제 상대가 느끼는 피해의 감수성보다 스스로 과민할 수도 있고,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희생시킬 위험도 있다.


친절

친절함 역시 상대에게 상처 주거나 피해를 주지 않기를 희망하는 태도와 이에 따른 행동이지만, 적극적인 태도도 아니고 자기희생적인 태도도 아니며, 상호관계 내에서 가능한 모든 미묘한 폭력을 피하기 위한 형식적인 기술에 불과하다. 형식적인 기술이므로 반드시 공감능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요, 자기희생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자기 보호적인 기술이므로, 어쩌면 사회적 동물로서 가장 기본적으로 습득/촉진할 수 있는 미덕이다. 다만 사회적 관계라는 것 자체가 상호 간 개입이 없이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이는 관계를 ‘만드는’ 미덕이 아니다. 즉, 친절한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차가움은 전혀 모순적이지 않다.


존중

친절함이 단지 외형적인 기술이라면, 상대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을 유보하는 태도는 상대에 대한 존중이라고 할 수 있다. 친절함과 달리 기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판단에 대한 메타-판단이므로, 여기에는 일정한 지적 겸손이 요구되고, 지적 겸손은 또한 어느 정도의 지적 훈련을 요구한다. 이런 특성 때문에 존중하는 태도 자체를 곧 지적인 태도라고 여기는 경우가 흔하지만, 안타깝게도 명제가 참일 때 그 역이 참인 것은 아니다. 어쨌든, 그럼에도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이 친절을 기본적인 미덕으로 삼는다면, 정치적 동물로서 한 발 나아가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미덕은 이 존중이 아닐까 하다.  


따뜻함

우리가 따뜻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남에게 물질이나 시간, 관심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다. 따뜻함은 착함처럼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것이고, 경우 바름처럼 균형적인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것이다. 상대가 좋고 기뻐할 것을 기대하며 개입하는 것으로,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고 감정적인 것일 수도 있으나, 어쨌든 스스로의 자원을 다른 사람을 위해 소모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친절함과는 달리 관계를 '만든다'. 다만, 일방적인 기대이므로 상대가 느끼기에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사려 깊음과 배려

사려 깊음은 내 행동이 상대방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미리 생각하는 태도다. 사려는 원인과 결과를 유추하는 것이므로, 공감적이라기보다 지적이다. 적극적이고 일방적인 행동에 위험을 제거하고 효과를 제고하며, ‘문화’를 부여해준다. 따라서 따뜻함에 ‘사려’를 더하고 ‘공감’을 강화한다면, 상대의 부담까지 생각하고 행동하는 배려의 태도를 갖게 된다. 경우 바름이 균형감에 기반하고 있다면 여전히 배려는 일방적인 것이고 베푸는 것이다. 그럼에도 상대방으로 하여금 짐으로 느끼게 만들지도 않는다. 이를 고도로 가다듬을 경우 ‘우아함’의 수준에 이른다. 그 지점에서 사회적 관계는 아름다움이 된다.


진정성

진정성은 상대 혹은 상호관계 내 있어 필요한 것을 진심으로 추구하는 태도다. 진정성은 내용 규정적이지 않으므로 예의 바름도 아니요, 균형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므로 경우 바름도 아니며, 관계에 개입하는 행위이므로 착함이나 친절함도 아니고, 상대가 좋고 기뻐할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므로 따뜻함과도 다르다.  상대 혹은 상호 간 필요한 행동이므로 ‘공감’을 기준으로 함은 물론이고, 정언명령처럼 ‘해야 하는’ 의미가 들어있으므로 보편적인 윤리기준도 요구된다. 상대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장치들, 즉 예의, 경우, 친절함, 착함을 모두 무시하므로, 이것이 독선적이고 사려 없는 행동으로 이어질 경우 매우 위험하다. 어떤 사람이 ‘진국’ 일 경우 다른 사람에게 ‘진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New Year’s Resolution 2019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