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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교주 Dec 12. 2023

교회언니의 안 성(聖)스러운 이야기-1

페이스대로 가더라도 너무 가망이 없는 거 아닌가요.

"너는 왜 하는 거마다 되는 게 없니. 네 팔자도 참..."


친정엄마가 그랬다.

2시간 전 난임병원에서 세 번째 피검사를 하고 자궁 외 임신인 거 같다는 소견을 듣고 착잡한 마음에 결혼 전 키우던 반려묘를 보러 친정에 가서 들은 엄마의 말이다.




생각해 보면 안 되는 거 투성이이긴 하다.

노력하는 거에 비해 결과가 늘 형편없고, 남들 앞에서 당당하고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말할 뭐 건더기도 없었다.

늘.

그럭저럭 대학교 졸업까지는 또래 아이들과 비슷하게 성적과 적성에 맞춰 기적적으로 운과 그동안의 기도가 닿아 입학하고 졸업했지만,

그 이후 남들 다 가는 대기업, 남들 다 하는 취업, 남들 다 하는 연애, 남들 다 하는 결혼, 남들 다 하는 육아, 남들 다 하는 내 집 마련?을 못하고 있는 게 나의 현실이다.

그래서 나는 사실 노력은 결과로 돌아온다는 말을 안 믿는다.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고, 소같이 성실하고 노력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몸소 배워 알고 있다.

 


나는 모태신앙이다.

나의 친가. 는 나까지 4대째 기독교 집안으로 소위 조선시대 때부터 하나님을 믿어온 아버지 쪽의 혈통과 문화를 물려받았고, 나의 외가. 는 외할머니가 천주교신자로 친정엄마도 결혼 후 아버지에 의해 개종한 케이스이다. 

때문에 자연스레 태어나면서부터 교회에서 나고 자랐다.

커가면서 교회가 아닌 유교문화가 우리나라에 뿌리 깊은 문화라는 걸 알게 되었고, 친구들과 명절 문화가 다른 것에 문화충격을 한두 번 받은 게 아니었다.

어쨌든 그런 여러 고충과 세상의 유혹에 휩쓸리기도 했었지만 

소위 세상의 기준 (때 되면 뭐가 되고, 때 되면 뭘 이뤄야 하는 한국 특유의 사회적 평념)과 맞지 않게 나의 길을 가더라도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기에 힘써 내 마음을 지켜 신앙을 지켜왔다.


지금 글을 쓰는 나의 나이는 마흔한 살. 아니 이제 만 나이 폐지로 다시 마흔이 되긴 했지만, 

한국에서 나이 마흔에는 무엇이 되어 있어야 하고, 무엇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할까?


나는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가정형편으로 입시미술을 하지 못했고,

여차저차 시각디자인을 전공했지만 프리랜서 강사를 전전하다 미술교습소를 운영하다 폐업도 했고,

꽃다운 나이 첫사랑과 지질하게 헤어졌고 이후 더 지질한 연애만 하다가 서른아홉이 되어있었다. 

작년 2022년 12월에 그때 당시 마흔의 마지막 12월에 결혼을 했고,

난임병원을 다니며 시험관 1차 시술 후, 임신을 했지만 자궁 외 임신이라는 비정상임신으로 결국 유산을 했고,

우리 부부는 각자의 경제상황 때문에 2억 후반대의 13평짜리 조그마한 빌라에서 살고 있다.


친구들과 지인들은 대학을 가기 위해 미술대학을 목표로 입시미술을 시작했고,

여차저차 유학도 다녀오고 해외여행이며 견문을 넓혀가며 이력서와 스펙을 늘려 

점점 복지와 처우, 능력과 가능성을 인정받는 큰 기업으로 이직도 성공해 갔고,

이미 빠르면 10년, 늦어도 6,7년 전 서른 초중반에 사랑하는 짝을 만나 결혼했고,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자연임신에 성공하고 벌써 그 아이들이 초등학생이기도 하다.

그들 부부는 작은 신혼집에서 시작해 식구가 늘며 청약도 당첨되고 신도시의 신축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남편을 만나기 전에는 바로직전 헤어진 남자친구와 이별 후 이제는 내 인생에 남자는 없을 거라 생각해 혼자라도 화려한 싱글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독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출, 자취방, 부동산, 전세, 매매, 월세, 인테리어, 직장... 

그런데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남편을 만나고 나니 또 다른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결혼 전에는 왜 주변에서 우스개로 "돈 많은 남자 만나~" 하는지 몰랐는데 물질만능주의가 맞긴 했다.

삶을 살아가는데 돈이 필요한 게 많으니까... 

의식주부터 소소하게라도 부부가 추억을 쌓으려면 돈이 필요했다.

맛집을 가도 돈, 멀리 가지 않고 교외의 핫플레이스를 가도 돈..

결혼하니 월급보다 정확하게 날짜를 알고 빠져나가는 전세대출이자와, 빌라라서 크게 관리되는 것도 없는 거 같은데 매달 빠져나가는 관리비, 시험관을 시작하면서 감사하게도 정부지원을 받지만 부수적으로 들어가는 진료비와 약제비(심지어 여러 상황으로 이식까지 중도 취소 하게 되면 물어내야 하는 지원금...), 버는 돈은 한정적인데 꾸준히 나가는 돈은 일정하다 못해 증식을 하니 나도 모르게 옛날 드라마에서처럼 이러다 곧 남편 바가지를 긁을 거 같았다.

몸 건강하고 한창나이라 그러는 글 쓰는 너는 뭐 하세요?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남편이 힘들게 벌어온 돈으로 하는 거 없이 저는 이런저런 이유로 몸이 편찮아 이 병원 저 병원 통원 치료를 받으며 남편한테 기생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한 번도 '당연히 네가 생각한 데로 이걸 줄게'라고 하시는 것이 없었다.

아직 인생 반나절 겨우 살았지만, 이제까지의 나의 인생에 늘 그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믿는 나(하나님)는 너의 인생이 탄탄대로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정성이 갸륵해서 들어주는 게 아니라, 광야 같은 길을 예비했어도 나와 같이 걸어가자고.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 시니라.  잠. 16:9

                    




흔히들 그런다, 남들과 비교하지 말고 내 페이스대로 끝까지만 가라고. 완주하는 게 인생이라고.

그런데 생각보다 사람들은 남과 뒤처진 사람, 남보다 평균이하인 사람을 손가락질하거나 속으로는 께나 비아냥 거린다. 그리고 내가 저 사람보단 낫다는 걸 확인하고는 안도를 하거나 위로를 얻기도 한다.


우리 엄마는 어려서부터 나를 그렇게 남과 비교를 했다. 물론 "옆집 누구는 성적이 이렇다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니?" 이런 건 아니고, "너는 세준(가명. 친동생) 만도 못해. 쟤는 너보다 한참 어린데 엄마가 하란데로 잘하는데 넌 왜 누나가 돼서 그 모양이니? 에이고.. 쯧쯧..!!!" 친동생과의 비교는 훗날 어른이 되어 생각하니 정말 치욕스럽고 자존감과 자존심, 그리고 가정 내 나름의 탄생서열? 에 대한 자부심을 무너트리는 매우 좌절감 넘치는 경험이었다. 

성인이 된 지금도 엄마는 입버릇처럼 동생을 향한 칭찬은 입에 마르지가 않는다. 반면 시집가서 출가외인 된 나한테는 전화로도 그렇게 나의 근황을 캐묻고는 안 되는 일들에 대해 "대체 넌 왜 그래??" 라며 나한테 묻는다.

나도 알고 싶다. 내가 왜 이렇게 안 되는지, 안 풀리는지, 뜻대로 바람대로 되는 게 하나 없는지...


어린 시절의 엄마는 꽤나 다정하고 솜씨가 좋아 마술사 같았다. 손재주가 있어 배냇저고리부터 유치원 다닐 때도 엄마가 직접 재봉한 옷을 엄마와 커플룩으로 맞춰 입고 다니면 사람들이 너무 이쁘고 잘 어울린다며 엄마와 나를 보며 칭찬해 주던 분위기가 생생하다. 

친구들이 미미인형을 가지고 놀 때 나는 봉제인형을 엄마가 리뉴얼해 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소중한 인형을 갖고 있었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엄마와 나는 늘 스케치북을 펴놓고 놀았었다.

8살이 되어 동생이 태어났고, 서울 상계동으로 이사한 나는 곧 초등학교를 전학을 갔다.

이전의 동네보다 단지가 매우 큰 아파트였고, 한 층에 10호의 세대가 있는 복도식 아파트에 5호~10호까지 정말 모두 그 집 아이들의 나이가 나와 동갑이었다.

때문에 엄마는 옆집 아줌마들과 금세 친해졌고, 돌아가면서 반상회를 하듯 학교를 하고 집에 오면 엄마들은 하루는 지혜네, 하루는 미영이네, 하루는 선호네... 모여 다과를 나누고 있었다.


여느 엄마들, 여느 여자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듯 시시콜콜하거나 대단한 이야기들을 나눴으리라 생각한다.


그중 지혜네 엄마는 자식들의 정말 별거 아닌 시시콜콜한 이야깃거리가 자랑이고 본인의 행복이었던 거 같다.

"아이고 이번에 우리 종훈이 (지혜오빠) 중학교 갔잖아! 반장선거 나갈 거라고 하는데 자기는 싫다고 했데, 근데 담임이 딱, 너 반장 얼굴이라고 나가라고 했다고! 근데 얘가 또 지 아빠 닮아서 얼굴은 반반하잖아!"


또 윗 층에 사는 진영이네 집은 지금 생각하면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집이었던 거 같다. 아파트가 떠나가라 밤새 소리치는 소리가 들리기도하고, 실제로 창문밖으로 살림살이가 날아다니기도 했었다.

"어제 우리 집 시끄러웠지? 신랑이 또 술 쳐 먹고 와서 이거 티브이 해 먹었잖아. 애 잡겠다고 몽둥이 들고 설쳐대는데 어떡해. 내가 너 죽인다고 부엌에서 식칼 들고 가서 어제 그 난리를 쳤어. 내가 진짜 못살겠어.!!!" 


어느 날은 여름날이라 학교를 마치고 집 앞에 오니 현관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뭐 때문인지 살금살금 복도를 걸어간 나는 엄마가 다른 엄마들에게 내 흉을 보는 소리를 들었다.(물론 그때의 이야기가 정확히 기억나는 건 아니고 대략 뉘앙스를 복원한 이야기)

"교주 쟤는 애가 키도 작고, 얼굴도 불여시 같이 생겨가지고 성격도 너무 고집스러워가지고 내 말을 한 번 하면 안 들어. 지가 한번 마음먹은 건 꼭 지맘대로 해야 돼. 아주 버릇없고 쟤 생각하면 너무 짜증이 나 죽겠어. 진짜 일부러 나 힘들게 하려고 하는 건지 동생은 안 그러는데 대체 쟤는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

이 말을 들은 진영이네 엄마가 "그러면 애를 잡아야지. 매를 들어, 매를! 애들은 때리면서 가르쳐야지 안 그러면 아주 힘들어!"라는 말을 했었다. 

그리고는 어느 날인가 엄마와 다툼이 생겼는데, 정말 별거 아닌 일 (아마 기억에 과제를 한다고 바닥에 스케치북을 늘어놓았는데 동생이랑 놀아주려고 그대로 펼쳐둔 거를 엄마는 정리를 일부러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로 엄마가 결국에는 부엌에서 식칼을 들고 와서 "당장 지금 스케치북 치워!!" 라며 소리를 질렀다.


처음이었다. 엄마가 폭력을 쓰기 시작한 건.


나중에 30살 즈음, 내 마음의 치유를 위해 미술치료를 배운 적이 있다.

나의 상태를 점검을 받아야 치료사로서 정진할 수 있기에 나의 과거, 나의 상처, 나의 마음이  학습이 대상이었고 과제로 늘 상기된 어느 때의 기억과 감정을 맞닿드리는게 있었다.

한 번은 그때의 칼을 들고 온 엄마의 모습이 생각이 났었고, 목욕탕을 가서 엄마에게 자연스럽게 물었다.

"어릴 때 칼 들고 혼냈던 거 기억나? 세준이가 놀래가지고 누나 지켜준다고 안아주고 엄마는 소리 지르고. 그때 왜 그랬어?"


"그 윗집 진영이네 엄마가 애들 혼낼 때 그렇게 한다더라고. 그래서 그렇게 해도 되나 보다- 했지."


대답은 너무 단순하고 간결했다...


나는 아직까지도 엄마라는 이름의 상처가 괴롭히고 있는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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