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3호 할머니

by 현지



나는야 트리플 A형. 아, 요즘은 MBTI가 대세지.

나는야 요리 보고 조리 봐도 INFJ. 자랑은 아니지만 내향형 비율이 90% 나왔다.

워낙 낯가림이 심하다 보니 처음 보는 이들과 눈을 맞추며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게, 일주일 동안 외출 안 하는 것보다도 훨씬 힘들다. 그래서 한 번 외출할 땐 그 주에 필요한 다른 업무까지 묶어서 해결한다. 좀 더 어렸을 땐 대체 저 안에 뭐가 들어갈까 싶을 정도로 작은 미니백을 선호했는데, 희한하게 외출 반경이 줄어듦에 따라 점점 가방의 크기가 커지더니 이젠 소재까지 가벼워진다. 기저귀가방이 왜 입소문을 타는지 알 것 같다. 즉 화실, 마트 외에는 평소 외출이 거의 없다는 소리다.


그날은 새로 산 나일론 쇼퍼백에 한가득 짐을 때려 붓고 나서는 길이었다. 우리 집은 22층이다. 운 나쁘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것도 한참이고, 금방 타더라도 1층까지는 또 한참이다. 그날 엘리베이터는 9층에서 한 번 멈췄다. 허리가 약간 굽어 나보다도 자그마한 할머니께서 타셨다. 할머니는 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너무나 밝고 명랑한 인사를 건네셨다.


할머니는 아주 자연스럽게 처음 보는 얼굴이라며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냐, 새댁이냐 물으셨다. 누구나 할법한 무의미한 호구조사라 생각해 짧은 대답을 마쳤다. 30초가 채 되지 않는데도 어색함을 이기지 못해 숫자판만 멍하니 바라봤다. 1층 문이 열리자마자 서둘러 목례를 하고는 도망치듯 내렸다. 좋은 하루 되세요~ 하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등 뒤로 일렁였다.


열흘쯤 지났을까.

우리는 다시 만났다.






할머니는 처음보다 두 배 반가워하시며 내가 보고 싶었다고 하셨다. 근데... 바빠요~?라는 말간 눈을 보고 어찌 바쁘다 할 수 있겠는가.


“잠깐 작업실 가는 길이긴 한데... 시간은 좀 있어요.”

“근데... 짐이 많은데... 멀리 가요~?”

“아. 아니에요. 안에 든 건 없고 가방만 커요.”


그러자 할머니는 손녀라도 만나신 듯 나를 이끌고 놀이터 벤치로 자연스럽게 리드했다.


“10분만. 10분만 나랑 놀아줘요. 나 종교도 없고 물건 팔 것도 없어요. 친구도 없어요.”


약간 머뭇거리던 나를 기어코 앉히신 할머니는 이 아파트에 처음 이사 오게 된 날 비가 엄청 내렸다는 것부터 시작해 아드님네가 미국에 있어 몇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다는 이야기를 지나, 집 근처 마트는 과일이 참 맛있고, 저번 달 누수 때문에 화장실 타일을 또 뜯었다는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쉬지 않고 말씀하셨다. 그래. 차라리 무의미한 호구조사보단 훨씬 낫다. 게다가 이 할머니... 이야기를 참 맛깔나게 하신다. 동화책을 읽어주는 듯 따사로운 할머니의 목소리를 따라 꼿꼿했던 마음이 어느새 말랑해졌다.


“그래서 선생님은 무슨 작업해요~?”

“저는 그림 그려요. 아직 뭐 대단하진 않지만...”

“우와~ 우리 집에 멋쟁이 화가 아가씨가 살고 있었네~”

“아닙니다... 아니에요. 멋쟁이도 아니고 아가씨도 아니에요...”

“아기가 있어요~?”

“아뇨... “

“요즘 세상 아기 없으면 아가씨지~ 나한텐 환갑도 아가씨처럼 보여요. 오호홍”


오호홍. 오호호홍.

신기하리만큼 정확한 딕션의 그 웃음이 이상하게 오래 남는다. 이어 할머니는 20여 년간 만난 아파트 이웃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다. 남녀노소 수많은 이웃을 마주치셨다. 반가워하면 떠나고, 또 새롭게 반가운 얼굴들이 생겨난다. 그게 그렇게 재미있어서 우리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좀 더 느렸으면 좋겠다고, 누군가의 안부를 묻기엔 9층은 너무도 낮다고 덧붙이셨다.


부끄러웠다.


엘리베이터가 멈출 때마다 한숨을 쉬며 낭비로 치부해 버린 그 시간들이 903호 할머니에게는 쓸쓸한 일상 속에서 우연한 온기를 발견하고 나누는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니. 나는 효율이라는 명목 따위로 삶의 여백들을 얼마나 무심히 지워냈던가. 우리는 약속한 10분을 훌쩍 넘어 30분 정도 수다를 떨었다. 할머니의 작은 어깨에 벚꽃 잎 하나가 톡 떨어졌다. 할머니는 그 꽃잎을 조심스레 떼어 내 손에 쥐어주곤 읏챠. 하고 일어나셨다.


“오늘 고마웠어요. 귀한 시간 늙은이한테 써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또 봐요, 화가 아가씨~”


네. 또 봐요. 꼭.






우리가 결정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뿐이란다.
- <반지의 제왕>, J.R.R. 톨킨




시간.

나는 그동안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믿었다. 항상 무언가에 쫓기듯 달려왔고, 뒤처지는 기분에 자주 불안해졌다. 남들은 이미 저만큼 가 있는 것 같은데, 나만 계속 제자리인 것 같아서. 누구에게나 주어진 시간은 똑같으니 쉴 새 없이 더 빠르게, 더 많이, 더 잘 해내야 한다고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멈춘 만큼 도태되는 거라 생각했다. 그 시간에만 가능할 것 같은 어떠한 일들이, 미처 달성되지 못하고 지나쳐버릴까 봐 두려웠다. 진짜 휴식의 의미도 몰라 집에 있는 시간이 길든 짧든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쉰다'는 게 도대체 뭔지, 어떻게 하는 건지 아직도 도통 모르겠다.


그래서 엘리베이터에서의 짧은 멈춤조차도 내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라 여겨 답답했던 거다. 반면 903호 할머니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 시간을 보내고 계셨다. 서두르지 않고 곁에 있는 사람의 표정을 살피고, 흘러가는 인연을 마냥 기쁘게 배웅하는 넉넉함. 그 모습은 어딘가 느긋하고 단단해 보였다. 할머니의 작디작은 체구가 거대한 산처럼 다가왔다.


어리숙한 나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시간을 실패로 여겼다. 너무 이른 답을 원했던 서툰 욕심 때문에 그 시간이 주는 진짜 의미를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헛된 경험도 매몰차게 잘라내고 싶지 않다. 텅 빈 고요뿐일지라도 그 안에 좀 더 머물러 보고 싶다. 별 의미 없다고 여겼던 순간들.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순간까지도 이전보다 조금 더 오래 들여다보고 싶다. 그러다 보면 나를 둘러싼 여러 존재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법을, 더 나아가 나 자신을 다독이는 법도 조금은 알게 되지 않을까.


느리고 무의미해 보여도, 그 안에서 어떤 계절이 영글어가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니.



903호 할머니가 쥐어주신 벚꽃 잎은 화장대 위에서 어느샌가 바짝 말랐고, 놀이터 벚나무들은 언제 꽃을 피웠냐는 듯 빳빳한 잎들로 무성히 뒤덮였다. 또 계절 하나가 무심히 지나가고 있다. 오늘 쓸 일이 없을지라도 일단 눈에 보이는 짐을 나일론 쇼퍼백에 와라락 때려 넣고 나선다. 여느 날과 같이 빈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어쩐지, 벚꽃 향이 남아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멋있게 말하고 멋없게 돈 벌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