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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지 Dec 21. 2018

어린시절의 '웃픔' 한조각
<아기공룡둘리-얼음별대모험>

타임코스모스를 타고 어린이의 삶과 어른의 삶 사이를 유영하다

 90년대 중후반, 내가 유치원에 다니기도 전. 우리 집 앞에 소방대원들과 아파트 경비아저씨가 총출동했다. 나를 집에 두고 외출하셨던 엄마께서, 내가 현관문 자물쇠를 어떻게 여닫는지 몰라 문을 열어주지 못하자 '막내가 집에 갇혔다!'며 패닉에 빠져 119를 불렀던 것. 하지만 코흘리개였던 나는 밖에 모인 사람들의 애타는 속도 모르고 문 너머로 해맑게 외쳤다. "엄마!" "응, 아가! 엄마 여기 있단다!" 울먹이는 엄마를 향한 나의 다음 대사.


"나 둘리 비디오 보고 싶어!"

 

 문 밖에서 소방관 아저씨들의 헛웃음이 터졌다. 엄마는 민망해서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고 지금도 종종 그때를 회상하신다. 자신 때문에 온 동네가 뒤집어지든 말든, 그저 '둘리'나 보고싶어 했던 꼬마 막내딸의 모습을. 그 정도로 내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던 <아기공룡둘리: 얼음별 대모험>은, 당시에 내가 하루에 한 번 꼭 보지 않으면 안 됐던, 내 인생 최초의 장편 영화이자 최다 시청 영화였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

 영화 속 둘리가 수없이 외치는 이 대사는, 당시 나의 최대 욕망의 투영이기도 했다. 주말이면 이웃 아줌마 아저씨들을 집에 불러 저녁을 대접하고는, '어린이는 절대 못 마시는' 커피나 맥주를 홀짝이며, 꾸벅꾸벅 조는 나를 품에 안고 늦은 밤까지 뜻 모를 어려운 단어로 수다를 떨고 웃는 부모님의 모습은 내 동경의 대상이었다. 둘리 역시 말한다. "어른이 되면 돈 마음대로 쓰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놀고 싶을 때 놀잖아!"



 지금의 나는 이 대사가 얼마나 틀렸던가를 생각한다. 그저 '웃프다.' 스무 살을 훌쩍 넘긴 지금의 나는 돈을 마음대로 못 쓰는 건 물론이고, 자고 싶을 때 자는 것, 놀고 싶을 때 노는 것은 더더욱 못한다. 어른이 되면 오히려 세상의 그 무엇도 내 뜻대로 굴러가지 않으며, 남의 눈치는 더 보이고, 나날이 무기력해진다는 것은 한참 나중에야 알았다. 여유만만해보였던 96년도의 부모님도 곧 터진 IMF의 수렁에서 몇 년을 허우적대셨고, 그 무렵 이웃 아줌마 아저씨들도 먹고 살 길을 찾아 전국 각지로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더 이상 우리집에서 볼 수 없었다는 것도, 한참 나중에야 안 사실이다.


 아무튼, 어른이 되고 싶다는 둘리의 고집스런 욕심으로 둘리와 친구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우주를 건너 먼 미래로 가면서 이야기는 진행된다. 그런데 이 모험의 멤버 구성이 참 의미심장하다. 망한 서커스단에서 도망친 타조 또치, 어리바리한 방구석 음치 주제에 슈퍼스타를 꿈꾸는 마이콜, 지구에 불시착했지만 우주선이 고장나 오갈 데 없는 외계인 도우너, 그리고 무엇보다 1억년 전 동족이 모두 멸망하고 유일하게 남은 최후의 개체, 둘리. 모두 '현재'의 삶에 편히 발 붙이지 못하는, 떠돌이, 아웃사이더, 현실부적응자, 외톨이다. 이들을 보고 있자면 어린이를 겨냥한 애니메이션에서 느낄 거라 흔히 예상치 못하는, 고독함이나 애틋함, 연민과 막막함 등등 온갖 '어른의 감정들'이 미취학 아동인 내 심장을 살며시 찾아와 두드렸다. 이 모험의 끝에는 이들이 각자 원하는 근사한 미래가 있기를, 어린 마음에 얼마나 바랐는지. 




 미래로 가겠다는 둘리의 염원이 워낙 강했는지, 결국 이들은 아주 극단적인 미래에 도착하고 만다. 죽은 영혼들이 사는 얼음별에 도착한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사는 소녀 공룡 공실이의 말처럼 "모든 이의 과거이자 미래"인 이 곳에서, 코흘리개 어린이가 감당하기엔 벅찬, 온갖 서러운 감정들이 폭발한다. 그리고 미래란 기대하는 것만큼 근사하지 않으며, 어른이 된다는 것은 고길동의 쌍문동 집에 얹혀 살 때처럼 마냥 해맑을 수 없이 복잡한 감정들의 중첩이라는 사실은 '1996년의 나'보다는 20년 후 지금의 내 마음에 더 아프게 꽂힌다.

 언젠가는 둘리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 앞에 잃어야 한다는 것도. 언젠가는 고길동처럼 삶에 찌들어 '성질 더러운' 어른이 돼야 한다는 것도. 마이콜처럼 어설픈 재능으로는 슈퍼스타가 되겠다는 어린 시절의 찬란한 꿈은 죽어서 저승사자 앞에서나 이룰 수 있고, 결국 현실과 꿈을 타협해야 한다는 것도.

 그래서 <둘리>를 보고 난 날은, 왠지 기쁨과 슬픔이 조그만 가슴 안에 묘하게 범벅된 채로 저녁놀을 보다 잠에 들었다. 그게 내 어린 시절의 일과였다.



 얼음별에서 둘리는 그리워하던 엄마를 만났지만, 죽은 엄마와 살아있는 둘리는 함께할 수 없기에 둘은 눈물의 이별을 한다. 그런데 이 억장 무너지는 이별 직후, 지구로 돌아가는 길에 둘리는 고길동과 능글맞은 농담을 주고 받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둘리는 다시 '현재'의 지구로 돌아가 친구들과 어린이다운 천진함을 뽐낼 것이다. 놀라운 회복탄력성이요, 찰리 채플린급 희극과 비극의 반전 능력이다. 시간을 달려 '어른의 감정'을 미리 맛보게 해준 후, "아직 어린이인 걸 다행인 줄 알아!" 하고 섬뜩한 일깨움을 주는 것. 그게 둘리의 진짜 초능력이 아닐까. 현재를 즐겨라, 호잇! 웃어라, 호잇!


 둘리의 초능력은 가슴에 남아 그대로 지금의 나의 유머코드이자 정서 그 자체가 됐다. 둘리 덕분에, 나는 남친과 헤어진 후에도, 숱한 면접 탈락 후에도, 눈물을 쏙 빼고도 얼마 후면 쓱쓱 털고 일어나 속없이 웃는다. 둘리처럼, 현재에 충실하기 위해.





 나는 둘리가 영원할 줄 알았다. 앞으로도 영원히 대한민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캐릭터로 남을 줄 알았다. 2009년 쯤인가? 다리뼈가 부러져 찾은 대학병원 로비의 TV에서 리뉴얼된 신(新) 둘리를 방영하는 걸 우연히 봤다. 구(舊) 둘리보다 마냥 밝고 행복해 한결 어린이다워 보였다. "요리 보고 조리 봐도~"로 유명한 서정적인 옛 주제가 속 '알 수 없는', '그리워', '외로운' '아득한' 같은 어른스런 단어는 새로운 주제가엔 없었다. 그리고 신(新) 둘리는 그로부터 몇 개월 뒤 종영돼 TV에서 사라졌다. <얼음별 대모험>의 한 많은 둘리를 아는 사람은 전부 성인이 됐고, 8090 키즈만의 감성이 됐다.


 그 이후로도 내심, 이 영화의 극장 재개봉을 바랐다. 하지만 소식은 잠잠했다. 나중에야 안 건데, 원작 필름이 유실되는 바람에 복제본을 가져다 독일 업체에 의뢰했고, 2015년에야 HD 리마스터링이 완료됐다고 한다. 여전히 나는 재개봉을 기대한다. 그 시절에 꼬마였던 사람들이 극장을 찾아 눈물 콧물을 짜 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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