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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숙정 May 18. 2021

자식 입에 밥 들어가게 한다는 것은 말이지...

"어떻게, 별일 없지?"

오래간만에 지인들과 연락을 하면 인사말처럼 하는 말이다. 잘 지냈냐는 선의의 안부 인사에 토를 달 요량으로 하는 말은 아니지만 늘 같은 대답을 한다.

"별일? 사는 게 별일이야."


사는 것은 늘 별일이었다. 그런데 이혼을 하고 보니 정말 먹고사는 것이 문제였다. 아이를 낳고도 하루 만에 일을 했고, 한 번도 쉬어 본 적이 없었지만 두 아이를 혼자 키운다는 것은 엄청난 무게로 나를 짓눌렀다. 큰 아이는 다행히 막 대학을 마쳤지만 취직 준비를 해야했고 작은 아이는 이제 중학생이었다. 과외를 하며 적지 않게 벌던 수입도 자궁선근종으로 수개월 하혈을 하고 수술을 받는 과정에서 반토막이 났다. 집도 없고 가진 돈도 없었다. 자식 입에 밥 들어가게 해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잠을 설쳤다.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돈의 필요성이 그때만큼 절실했던 적이 없지 싶다.


드라마 속 화려한 이혼은 현실에 흔치 않다. 복수를 하겠다는 마음도 먹고살아야 나온다. 나중에는 위자료와 양육비를 받아내기 위해 전화를 거는 일도 뜸해졌다. 하루 종일 일에 치이다 집에 오면 멍하니 앉아있기 일쑤였다. 막상 내가 이혼한 여성으로 살아보니 제삼자의 눈으로 지나쳐간 뉴스 기사 속 현실들이 매서운 칼바람으로 온몸을 스쳐갔다.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라 이혼한 것을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었고, 굳이 묻는 이도 없었다. 하지만 말이 넘쳐나는 직장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사회의 편견이 가득한 곳에서 이혼한 여성으로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야 하는 수많은 여성들은 어떻게 헤쳐나가고 있는 걸까?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하니 사람들 시선이야 개나 줘버려라 할 수도 있다. 먹고사는 문제는 다른 차원의 일이다.  전문직이나 기술이 있다면 모를까 아이들만 키웠던 여성이라면 그 막막함을 뭐라고 해야 할까?


이혼을 왜 했는지, 그냥 참고 살 수는 없었는지, 깨진 가정의 아이들이 정상으로 성장하겠는지 같은 쓸데없는 질문과 질책 대신, 안전하게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 결혼이 성공이 아니니 이혼은 실패가 될 수 없다. 결혼도 이혼도 비혼도 미혼모도 모두 선택의 문제다. 가족이 결코 하나의 형태일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선택으로 만들어진 가정을 누구나 안전하게 유지시킬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너무나 절실하다.  


그래도 시간은 흘렀다. 나는 이혼을 후회한 적은 없다. 그렇다고 결혼을 후회한 적도 없다. 다시 그 순간을 살았어도 나는 사랑을 하고 결혼을 했을 것이다. 지금의 나도 나이고 그 시절의 나도 나이기 때문이다. 이십여 년의 결혼 생활을 모두 원망하고 부정하며 시간을 낭비할 마음도 없다. 단지 경제적인 고달픔과 정신적인 고달픔 중 나는 경제적인 고달픔을 선택한 것뿐이다. 나는 빠르게 안정되어 갔고 평온해졌다. 아이들은 그런 나를 통해 안정감을 갖고 일상을 산다.


내 자식 입에 밥 들어가게 한다는 것은 말이지 '쎄가 빠지는' 일이다. 경상도가 고향인 엄마는 입버릇처럼 '쎄가 빠지게 너그들 키웠다'고 하신다. '쎄가 빠지게' 그 말의 뜻은 굳이 묻거나 찾아보지 않아도 느낌만으로도 알 수 있다. 그 말에는 자식 키우느라 힘들었다는 탄식보다 자신의 소임을 완성했다는 여자의 자부심이 더 많이 배어있다. 그걸 이제서야 느끼기는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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